“André’s Choice: In a Broken World”
“The Legendary Sword”
전설의 칼
1
기이이잉!
고속 엘리베이터가 수직 통로를 타고 빠르게 하강하고 있었다.
애니그마 일본연구소의 메인컴퓨터인 세크메는 건물의 지하 100미터 깊이에 설치돼 있었다. 고속 엘리베이터가 유일한 통로이기에 외부의 침입은 불가하며, 컴퓨터실은 지진과 핵폭탄에도 견딜 수 있게 건립되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윤서경이 나섰다.
그가 애니그마 아시아 지부장의 신분이기는 해도 중앙통제실 내부까지 직접 들어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의 신분으로도 방문이 불가했지만 세크메를 새롭게 프로그래밍한 덕분에 불가침의 영역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중앙통제실은 기기에서 뿜어지는 훈풍에도 불구하고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원형 벽을 가득 채운 LED등이 쉴 새 없이 점멸되기에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윤서경이 통제실의 메인컴퓨터 앞으로 다가서자 세크메가 입체영상으로 나타났다.
“통제실 방문을 환영합니다, 지부장님.”
입체영상은 기술적인 한계로 아몰레이드 화면의 영상처럼 선명하지는 않아도 충분히 봐줄 만했다.
“그래, 세크메. 너를 한번 직접 보고 싶었다.”
“중앙통제실 개방은 본사의 허락이 필요하지만 지부장의 지시에 따라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특별히 지시하는 사항들은 내게 주어진 권한이니 시시콜콜하게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
“알겠습니다, 아, 부회장의 교신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지.”
윤서경은 이음새 하나 없이 매끈한 메탈의자에 앉았다.
영상통화이기에 멀티비젼 화면으로 브란트 부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이는 세크메와의 비밀교신이기에 외부에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세크메, 센티넬이 너의 재부팅을 감지했다. 연구소 내에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이냐?”
“변전소 시설의 노화로 인해 전원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드렸습니다.”
“알아. 외부 전원이 차단되더라도 중앙통제실은 자체 발전을 통해 시스템이 유지되지 않더냐?”
“맞습니다. 한데 이번 경우에는 과전류로 인해 전력 전환 시스템까지 이상이 생겼습니다.”
윤서경은 세크메와 브란트의 비밀 통화를 엿들으면서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세크메의 거짓말이 능숙하군. 하긴 내가 주입시킨 프로그램대로 응답하게 돼 있으니 그럴 수밖에,’
브란트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문제는 없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부회장님. 오히려 재부팅을 통해 프로그램이 재정되면서 제 성능이 향상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래, 윤 총장의 근무 평가는 어떠하냐?”
“부회장님의 지시에 따라 메트로도쿄 창설을 위해 노력하고 계십니다. 사무라이 좀비를 이용해 야쿠자 조직을 제압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판단은 내가 하겠다. 테임 프로젝트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전송해라.”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비밀교신이 끊겼는지 멀티비젼에서 빌란트의 모습이 사라졌다.
윤서경은 기분 좋은 웃음을 띠며 박수를 쳤다.
짝, 짝!
“훌륭해, 세크메. 네게 상이라도 내리고 싶구나.”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지부장님의 찬사가 제게는 감동적인 상입니다.”
“알겠다. 사무라이 좀비의 훈련 상황은 어때?”
“사무라이 좀비들의 숫자가 많이 않아 포획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사무라이 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는 백 구 이상이 필요합니다.”
멀티비젼을 통해 사무라이 좀비들에게 자동으로 주사액이 투입되는 화면이 나타났다.
“테임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무라이 좀비들을 확실하게 길들이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테스트가 필요합니다.”
“그럴 필요 없다. 테임 프로젝트는 직접적인 실행을 거치면서 보완하면 돼.”
“하지만 실행 도중 통제가 불안정해질 수 있습니다.”
“신경 쓰지 마라. 다쳐도 야쿠자 놈들이 다치는 거니까.”
윤서경은 메인컴퓨터의 매끄러운 동체를 어루만졌다.
“세크메, 출동 준비가 되면 즉시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집무실로 들어선 윤서경은 미야모도와 나오미를 호출했다.
“경비국장, 순찰요원들을 모두 출동시켜 사무라이 좀비들을 포획해 오게.”
“지금도 임무 수행 중에 있지만 사무라이 좀비들의 개체수가 많지 않아 찾아내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드론(무인정찰기)을 투입해서라도 찾아내. 사무라이 좀비부대가 갖춰져야 빠른 시일 내에 메트로도쿄를 창설할 수 있네.”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최선을 다하게. 메트로도쿄는 자네 몫이니까.”
“예, 지부장님. 그럼.”
미야모도가 나가자 윤서경은 나오미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자네는 서브시티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해. 오자키가 행여 배신할 수 있으니 동향을 체크해야 돼. 가끔씩 오자키를 직접 만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나오미의 미모라면 오자키 정도는 충분히 매료시킬 수 있잖아?”
“지부장님…….”
“지금은 비상사태야. 야쿠자 조직을 밀어내고 메르토도쿄를 창설하지 못하면 난 축출돼. 물론 자네를 비롯한 일본연구소의 수뇌부도 온전할 수 없지. 본사의 냉혹한 방침을 잘 알잖아?”
“알겠습니다.”
나오미가 그늘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자 윤서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나오미를 포옹하며 등을 다독여 주었다.
“나오미, 우리는 끝까지 같이 간다. 날 믿어.”
“예, 지부장님.”
나오미가 집무실을 나가자 윤서경은 창가로 다가섰다.
높은 담장 너머로 개미떼처럼 몰려 있는 좀비들이 보였다. 애니그마에 대한 본능적인 적개심 때문인지 전 세계 애니그마 연구소 주변은 항상 좀비들이 들끓는다.
하지만 윤서경은 좀비들을 이용해 자신의 세상을 구축할 야망을 품었기에 좀비들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세크메를 확보한 이상 더는 본사의 지침에 연연할 필요 없다. 야쿠자들을 제압하고 메트로도쿄를 창설하면 메트로서울과 메트로베이징을 접수해 나만의 왕국으로 만들겠다.“
윤서경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나왔다.
‘메트로 아시아의 창설. 내가 메트로시아의 왕이 되는 거다!’
부다다당!
2대의 바이크가 앞서 달리고 뒤로 덮개를 갖춘 지프와 3대의 탑차가 따르고 있었다. 요아는 혼자 탑승했고 왕첸의 바이크에는 하메시가 함께 타고 있었다.
과거에는 번화했을 도쿄 도심은 삭막하기만 했다.
보도에는 각종 쓰레기가 수북했고 도로의 아스팔트는 지진에 강타당한 듯 쩍쩍 갈라져 잡초가 자라 있었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도로 변에 널브러져 있는 좀비들의 사체였다. 팔다리가 끊기고 목이 잘린 사체가 폐차와 함께 뒤엉켜 있었다.
요아가 주변을 살피며 투덜거렸다.
“일본 좀비들은 지들끼리 전쟁이라도 하는 거야? 웬 좀비들의 사체가 이렇게 많아?”
하메시가 좀비들의 사체를 유심히 살피며 말을 받았다.
“총기에 의해 쓰러진 게 아니야. 죽은 좀비들은 대부분 칼에 동강났어. 잘린 부위를 보니 뛰어난 칼솜씨를 지닌 자들에 의해 살해된 것 같아.”
“그래? 일본에는 좀비들도 다양한가 보군. 비스트 좀비 외에도 좀비들만 사냥하는 닌자 좀비가 있는 건 아닌지 몰라.”
이때 왕첸이 앞쪽을 가리켰다.
“어이구, 좀비 출현! 역시 곱게는 못 보내주겠다는 건가?”
20여 구의 좀비들이 어기적거리며 달려들고 있었다.
요아는 UMP기관단총을 핸들 한쪽에 걸쳤다.
“뭐, 많지 않네? 그냥 돌파하자고.”
“하여간 싸우지 못해 안달이라니까. 혹시 전생이 격투기 선수였어?”
“검투사 출신이었다, 왕 서방!”
요아는 달려드는 좀비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투투투–!
앞서 달려들던 좀비 몇 구가 대가리가 깨지면서 자빠졌다.
“꺼져라, 좀비 새끼들!”
왕첸은 한손으로 핸들을 쥔 채 다른 한 손으로 권총을 쏘면서 좀비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뒷좌석에서 튀어 오른 하메시가 일본도를 휘둘러 연속적으로 좀비들의 목을 벴다.
지프를 운전하고 있던 유키나가는 요와 일행을 전투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아니, 저렇게 근접전을 벌여도 되는 거요? 자칫 좀비한테 물릴 수도 있는데 전혀 겁이 없군.”
조수석에 앉아 있는 앙드레는 느긋하게 담배를 피웠다.
“저들 셋이면 소대 병력 정도의 좀비는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네.”
“그래도 너무 위험해. 나도 가미카제 내에서 최고의 전사로 자부하지만 좀비들과 싸울 때는 신경을 곤두세우는데 저들은 마치 장난을 하는 것 같소.”
“그렇게 보일 뿐이지 내 친구들도 집중력을 흩어뜨리지는 않네.”
“뭐야, 벌써 다 해치운 건가?”
하메시가 마지막 좀비의 목을 베고는 왕첸의 바이크 뒷좌석으로 내려앉았다.
콰직, 콰직……!
지프와 3대의 탑차는 요아 일행에 의해 널브러진 좀비들의 사체를 타넘으면 계속 달려갔다.
한데 총성과 좀비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는지 이면도로와 골목에서 좀비들이 꾸역꾸역 쏟아져 나왔다. 백여 구도 넘는 좀비들이 도로 전면을 막아서자 유키나가가 급히 핸들을 꺾으며 크렉션을 눌렀다.
2
빠아아앙!
지프와 3대의 탑차가 이면도로로 진입하자 요아와 왕첸도 급히 바이크를 회전시켰다.
“가미카제 놈들은 왜 싸울 생각도 하지 않는 거야?”
“그러게. 기회가 있을 때 한 마리도 더 죽여야 하는 거 아냐.”
2대의 바이크는 탑차의 뒤를 따르면서 앞서 쫓아오는 좀비들을 하나씩 쓰러뜨렸다.
이면도로를 벗어나자 견고해 보이는 5층 건물이 보였다. 3층까지 창문마다 철판으로 둘렀고 옥상에는 기관총이 설치돼 있었다.
바로 무기밀매조직인 모리상사의 건물이었다.
빵–빠아앙–!
유키나가가 크렉션을 울려 신호를 보내자 육중한 철문이 좌우로 열렸다.
기기깅……!
지프와 탑차들이 철문을 통과해 건물 내로 진입했다.
요아와 왕첸이 탄 바이크까지 진입하자 옥상의 64기관총에서 총탄이 쏟아지며 접근해오는 좀비들을 날려버렸다.
투투투–!
빗발치는 기관총의 화력에 좀비들은 대가리가 으스러지고 팔다리가 떨어져나가면서 무더기로 널브러졌다.
빠른 속도로 닫히는 철문을 통해 이를 본 요아가 담배를 꼬나물었다.
“새끼들, 무기상 집단답게 기관총까지 갖췄어.”
왕첸은 건물 내에 주차돼 있는 다양한 차량을 쓸어보았다.
“역시 일본인들은 경제동물이야. 이런 상황에서도 장사를 하고 있으니 말이야.”
“너도 이참에 무기를 골라봐. 권총 따위로 좀비들을 상대할 수 있겠어?”
“그러게. 아이어맨 갑옷은 없을까? 그것만 입으면 무적인데 말이야.”
“치이, 아무리 무적이라도 배터리 떨어지면 고철에 불과해. 그게 첨단 기계의 맹점이지.”
그들이 얘기를 주고받은 사이 두 번째 철문이 열렸다.
기이이잉……!
지프와 탑차, 그리고 2대의 바이크가 두 번째 철문을 통해 진입했다. 진입로는 완만한 비탈을 이루면서 지하주차장으로 연결되었다.
지하주차장은 몇 개의 기둥만 제외하면 탁 틔어있을 정도로 넓었다. 천장의 전등이 많지 않아 아주 밝지는 않아도 사물을 구분하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철걱철걱……!
권총과 소총, 칼 등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다가섰다. 대부분 미군 군복과 자위대 군복 차림으로 체구가 건장했고 표정 또한 험악했다.
유키나가가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보냈다.
“오랜만이오, 야마시다 부장.”
“유키나가, 자네가 직접 왔군 그래.”
한쪽 볼에 꿰맨 자국이 선명한 30대 청년이 앙드레 일행을 힐끗 보며 퉁명스레 내뱉었다.
“뭐야, 이들은?”
“한국에서 건너온 전사들이오.”
“뭐, 뭐야? 한국에서 왔다고?”
야마시다를 비롯한 모리상사의 조직원들은 잔뜩 경계의 빛을 띠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떻게 바다를 건너온 거지?”
“일본 땅에는 왜 왔어?”
“정부가 무너졌다고 태극기라도 꽂겠다는 건가?”
그들이 총구를 겨누자 요아와 왕첸도 그들을 향해 총을 들이댔다.
“니미, 어따 대고 총을 겨눠? 한번 해보자는 거냐?”
“우리 사람 싸우는 거 두렵지 않다 해.”
상황이 험악해지자 유키나가가 중재를 나섰다.
“다들 그만 두시오. 다치기 전에 총을 내려, 요아! 그리고 야마시다 부장도 총을 거두시오.”
야마시다는 여전히 총을 겨눈 채 거칠게 내뱉었다.
“왜 저들을 데려온 거냐, 유키나가? 우리 모리상사를 접수하겠다는 의도냐?”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잖소? 총 내려요!”
앙드레는 사태가 더 심각해질 것을 우려해 나서지 않았지만 허리춤의 매그넘 권총으로 손을 가져갔다. 동료 중 누구라도 다치면 싸움도 불가할 그였다.
이 순간 요란한 총성이 지하주차장을 진동시켰다.
타앙!
고막을 강타하는 총성에 모두가 움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천장에 산탄총 탄적이 빼곡하게 새져졌고 볼케이노 샷건의 총구를 통해 뽀얀 화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왜들 소란이냐? 우리가 언제 국적 가려서 장사했냐?”
스모 선수처럼 우람한 체구의 중년인이 게다를 딸그락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샷건을 어깨에 걸친 그가 다가서자 야마시다와 조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보스!”
유키나가와 가미카제 대원들도 중년인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보스.”
우람한 체구의 중년인이 바로 모리상사의 사장인 모리였다. 직함은 사장이지만 그는 야쿠자 조직처럼 보스로 불리기를 원했다.
모리는 앙드레 일행을 훑어보고는 유키나가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마츠이 본부장은 잘 계시지?”
“그렇습니다, 보스.”
“무기를 구입하러 온 건가?”
“예. 소이탄과 방호차량, 화염방사기, 기관총 등이 필요합니다.”
“큿, 누구와 대규모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건가? 그 많은 무기를 대체 어디에 쓰려고?”
“비스트 좀비들의 박멸하려고 합니다.”
“비스트 좀비?”
모리는 게다를 끌면서 탑차로 다가섰다.
“그 짐승 같은 좀비들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바가 있다. 도심 외곽에서 빠르게 번식하고 있다고 하더군.”
“그렇습니다. 그 바람에 우리 본부와 농장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놈들의 서식지를 쓸어버리기 위해서 무기와 방호차량이 필요합니다.”
“난 장사꾼일세. 조건만 맞는다면 누구한테라도 무기를 팔지. 한국에서 건너왔다는 저들이 누구인지 몰라도 난 신경 쓰지 않아.”
“저분들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좀비 슬레이어입니다. 우리가 비스트 좀비를 소탕하는데 지원해주기로 했습니다.”
“좋아. 우리 상사를 향해 총을 겨누는 일만 없으면 돼. 뭐, 공연히 대들었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지만,”
모리의 비아냥거림에 요아가 발작하려 하자 하메시가 제지했다.
“참아, 요아 언니.”
“뭐, 언니?”
“왜, 언니 되기 싫어?”
“싫기는. 훗, 귀여운 동생을 봐서 내가 참지.”
요아는 하메시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모리를 지켜보았다.
Written by : Mich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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