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ré’s Choice: In a Broken World”
“New Destiny”
새로운 운명
2014년, 서울
삐뽀삐뽀–!
다급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차가 서울 공덕동 중급 병원인 은성병원 응급실 앞에 멈춰 섰다. 어두운 저녁 하늘 아래, 병원의 푸르스름한 조명이 응급차에 실린 이들의 고통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출동한 의료진들이 서둘러 응급실 문을 열자, 구급대원이 침통한 표정으로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교통사고입니다! 모녀로 추정되며, 엄마의 상태가 위급합니다. 내출혈이 의심됩니다!”
피투성이가 된 여성의 모습을 본 담당 의사는 재빨리 손전등을 꺼내 동공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서둘러! 응급실로 옮기세요!”
의료진들은 빠르게 움직여 침대를 밀고 응급실로 들어갔고, 뒤이어 구급대원은 부상당한 소녀를 안고 내려섰다. 아이의 얼굴에는 충격과 공포가 어린 채, 그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이 아이는 심각한 외상이 없지만, 뇌진탕이 의심됩니다.”
“내가 데려갈게요.” 담당 의사가 소녀를 안고 급히 응급실로 뛰어갔다.
응급차가 다시 병원 밖으로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남겨진 것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긴박감과 어둠뿐이었다. 그러나 이내, 다른 차량이 병원 앞에 급정거하며 멈춰 섰다. 이번에는 구급차가 아니라, 회색빛의 SUV였다. 차가 급히 멈추자 운전석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차에서 내렸다.
건장한 체구에, 군복을 개조한 듯한 짙은 색 점퍼를 걸친 남자. 왼쪽 다리에는 쇠붙이 의족이 덜컹거리며 빛을 반사했다. 그는 의족에서 나는 쇳소리를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응급실로 발걸음을 옮기며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나! 제니!”
앙드레 김이었다. 그는 문 앞에 다가선 간호사를 거칠게 밀치며 묻기 시작했다.
“내 아내와 딸이 여기로 실려 왔다는 연락을 받았소. 어디 있소?”
간호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절차를 이야기하려 했지만, 앙드레는 그녀의 말을 끊고 다시 물었다. 그의 눈은 이미 절박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아내 이름은 송지나. 딸은 제니입니다. 어디있어요!” 더욱 큰 소리로 물었다.
간호사는 잠시 주춤하더니 결국 응급실 안쪽을 가리켰다. “조금 전 교통사고를 당한 여성과 아이가 있긴 한데…”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앙드레는 쇳소리를 내며 응급실로 돌진했다. 병실을 가로지르며 내뱉는 환자들의 신음소리와 의료진들의 다급한 외침이 귓가에 아른거렸지만, 그의 신경은 그저 한 곳에만 쏠려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마주한 장면—그는 피투성이가 된 아내의 모습 앞에서 멈추었다.
“지나!”
그는 의사들을 밀치며 송지나에게 달려갔다. 손에 잡힌 아내의 손은 이미 차갑고 축축했다. 그녀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상태였고, 앙드레는 마치 군에서의 임무처럼 그 순간을 통제하려고 했다.
“지나, 나야. 내가 왔어.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내는 의식이 흐려진 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피로 뒤덮인 얼굴 사이로, 힘겹게 눈을 뜨고 앙드레를 알아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앙… 앙드레…”
앙드레는 절망에 차 이를 악물었다. 그동안 숱한 전투와 죽음을 목격해 왔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사람을, 자신의 힘으로 구할 수 없다는 현실은 그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담당 의사를 붙잡은 앙드레는 마치 전장에서 지휘하듯 소리쳤다.
“살려낼 수 있는 거겠지?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안 돼!”
그러나 의사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유감입니다만, 대동맥 파열과 다발성 내출혈로 수술할 시간조차 없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손쓸 방법이 없어요.”
“그럴 리가 없어!”
앙드레는 의사의 멱살을 잡았다.
“무수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동료들도 살려냈어! 수류탄 파편에 맞은 사람도 수술을 받으면 살았어! 어떻게… 어떻게 교통사고로 내 아내가 죽는단 말이야!”
“선생님…”
의사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저도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임종을 함께하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앙드레는 그 말을 듣고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무기력하게 아내의 손을 쥐고 있는 동안, 그녀의 숨은 점점 더 얕아지고 있었다. 이 순간, 그는 평범한 남편으로서,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가정을 구할 수 없는 무력함에 가슴이 찢어졌다.
간호사는 몰핀을 준비해 송지나에게 투여했고, 그녀의 얼굴에는 차츰 고통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고요함과 안타까운 이별의 순간뿐이었다.
앙드레는 흐르는 눈물 속에서 아내의 마지막 손길을 느꼈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제니를 부탁해… 우리 아이를… 꼭 지켜줘…”
앙드레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흐르는 눈물만이 대답이었다. 송지나의 마지막 미소는 서서히 사라졌고, 그녀의 숨이 멎는 순간, 앙드레의 세상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병원 복도의 차가운 의자에 앉아 있던 앙드레는 그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내와의 마지막 순간, 그 마지막 키스가 아직도 그의 입술에 남아 있었다. 그 따스한 감촉이 지워지지 않아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죽음은 부정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정말 그녀가 떠난 건가?’
그 질문은 그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어두운 현실뿐이었다. 아무리 절망해도,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온몸이 쇠처럼 무거워졌다. 아내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가슴을 찢어놓았지만, 아직 딸 제니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송지나를 똑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그 속에서 두 사람의 영혼이 공존하는 듯했다. 이제 앙드레는 딸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딸 제니의 미래와 행복을 지키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차가운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제니에게 엄마의 죽음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어린 아이에게, 이제 엄마가 더는 곁에 없다는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앙드레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복도 끝에서 제복을 입은 경찰관과 사복 차림의 형사가 다가왔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진지했다.
“앙드레 김 씨 되십니까?” 사복 차림의 형사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무거운 책임감과 동시에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렇습니다.” 앙드레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생기가 없었다. 상실감에 젖은 그 눈빛은 형사와 마주하지도 못하고 허공에 맺혀 있었다.
“저는 마포경찰서 김학준 형사입니다. 이번 사고로 아내 분을 잃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김 형사는 진심을 담아 위로했지만, 앙드레의 눈빛은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더 이상 위로의 말 따위가 의미가 없었다. 이미 그의 마음은 아내와 함께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형사는 자신의 임무를 계속해야 했다.
“아내 분께서는 정상적으로 운전 중이셨습니다. 그런데 신호를 무시한 대형 트럭이 교차로로 돌진하면서 이번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저희는 최선을 다해 트럭 운전자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곧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듣자, 앙드레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범인, 그 단어가 그의 머릿속에 깊이 박혔다. 그 순간,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그의 가슴을 덮쳤다. 그는 몇 초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찾지 마십시오.”
그 한 마디는 너무나도 단호했다. 김 형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앙드레는 고개를 돌려 형사의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눈동자는 더 이상 비통함에 젖어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차가운 결단과 분노만이 남아 있었다.
“내가 찾을 겁니다. 경찰은 손대지 마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전장에서의 명령처럼 확고했고, 형사에게서 떨어진 눈빛은 더 이상 감정적인 남편이 아니었다. 이제 전직 군인 앙드레 김이 돌아온 것이다.
김 형사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앙드레를 막아야 했다. 복수는 법의 영역이 아니었다.
“김 선생님, 개인적인 복수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 또한 범죄입니다.”
그 말이 던져진 순간, 앙드레는 멈춰 서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미소 아닌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범죄라…” 경찰이 정의를 말한다는 사실이 우스꽝스러웠다. 정의와 법, 그것은 그의 세계에서 죽은 동료들을 살려내지 못했고, 지금 그의 아내를 구하지도 못했다. 이 세상의 법은 그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 법이 그의 고통을 치유해 줄 수 없었다.
형사 김학준과의 대화는 짧았지만, 앙드레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끓어오르는 분노와 복수가 자리잡고 있었다. 아내를 잃은 상실감이 너무도 커서 더는 위로의 말이 들리지 않았고, 그저 복수를 다짐할 뿐이었다. 그는 형사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도 않은 채 무심히 대답했다.
“흐흐흑, 범죄라고?”
“네 맞습니다, 그건 또다른 범죄입니다. 경찰을 믿고 기다려 주십시요.” 형사의 경고가 허공을 가를 때, 갑자기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
“김 선생님, 보호자분! 병리학과장님이 급히 뵙기를 원합니다.”
간호사는 다급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그 말에 앙드레는 형사에게서 시선을 돌려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불안이 커져갔다. 아내를 잃은 슬픔이 아직도 그를 옥죄고 있는 와중에, 또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제니에게 문제가 생긴 겁니까?”
앙드레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간호사는 말을 아끼며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병리학과장님이 설명해 주실 겁니다. 바로 가보셔야 해요.”
앙드레는 형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형사의 말을 끊고 급히 병리학과장 사무실로 향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복도에 울리는 그의 발소리만이 그곳의 침묵을 깨고 있었다. 형사와의 대화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이제 그의 생각은 오직 딸 제니에게로 향했다.
Written by : Mich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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