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ré’s Choice: In a Broken World”

“Betrayal”

배신

1

애니그마 일본연구소.

“오랜만에 뵙습니다, 지부장님.”

입체 영상의 여인이 연구동으로 들어서는 윤서경을 향해 다소곳 인사를 올렸다. 화려한 기모노 차림이지만 헤어스타일이 전형적인 서구 여인의 모습이기에 다소 어색하게 보였다.

“그래, 세크메. 다시 만나 반갑다.”

“테임 프로젝트를 참관하신다니 고맙습니다. 관람실로 안내하겠어요.”

윤서경은 입체 영상의 여인을 훑어보며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한데 네 기모노 차림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구나.”

“아, 그러세요.”

입체 영상이 잠시 흐려지더니 여인의 복장이 기모노 대신 한복 차림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 또한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입체 영상의 여인이 생긋 웃었다.

“이제 마음에 드세요?”

윤서경은 뒤에 서 있는 나오미와 경비국장 미야모도를 힐끗 보고는 실소를 지었다.

“더 어울리지 않아.”

“아, 죄송합니다. 패션에 대한 프로그램의 한계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부끄럽습니다.”

입체 영상이 다시 흐릿해지더니 여인의 복장이 유럽풍 드레스 차림으로 바뀌었다.

“좀 낫군. 문제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네 능동형 지능이 너무 앞서 나가는데 있어. 더 이상 복장에는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명심하겠습니다, 지부장님.”

세크메의 입체 영상이 사라지며 연구동의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윤서경은 나오미와 미야도모를 대동해 연구동으로 들어섰다. 세 사람은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진 원형 통로를 지났다.

통로와 이어진 문 앞에는 하얀 가운을 거친 구레나룻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중년인은 애니그마 일본 연구소의 수석연구원 후지쿠 박사였다. 그는 미생물학계의 권위자로 와세다 대학 출신이다.

“오셨습니까, 지부장님.”

“수고가 많소, 후지쿠 박사. 테임 프로젝트를 직접 보고 싶소.”

“겨우 일차 테스트를 마쳤을 뿐이라…….”

“괜찮소. 진행 과정을 점검하려는 거니까.”

“들어가시지요.”

자동문이 열리면서 네 사람은 20여 개 정도의 좌석이 갖춰진 관람실로 들어섰다.

관람석 앞에는 대형 전망유리창이 영화스크린처럼 설치돼 있었다. 전망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폐쇄공간은 마치 소규모 검투장을 방불케 했다.

후지쿠 박사가 전망유리창 한쪽에 설치돼 있는 멀티비젼을 향해 말했다.

“세크메, 테스트를 실시해.”

“예, 박사님.”

멀티비젼을 통해 잠시 전 입체영상으로 나타났던 여인의 모습이 훨씬 선명하게 보였다.

여인은 물론 현실의 인간이 아닌 애니그마 일본 연구소가 보유한 메인컴퓨터의 가상 모습이다.

메인컴퓨터의 이름은 세크메.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능동형 컴퓨터 AN5000기종으로 애니그마 한국연구소의 AN3000보다 개선된 신형이다. 애니그마 본사의 메인컴퓨터인 AN9000을 제외하면 최고 성능의 슈퍼컴퓨터라 할 수 있다.

“그럼 사무라이 좀비를 제어하는 테임 프로젝트 제 이차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스크린의 세크메가 흡사 스튜어디스처럼 깜찍하게 인사했다.

이내 관람실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대신 전망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실험실이 환하게 밝혀졌다.

그그긍……!

철장문이 열렸는지 쇠사슬 소리가 차갑게 들려왔다. 일순 전망유리창을 두드리는 좀비들의 끔찍한 모습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였다.

“카우우!”

스피커를 통해 좀비들의 괴성까지 생생하게 들렸기에 마치 좀비들과 맞닥뜨린 듯한 공포심을 자아냈다.

“아앗!”

나오미는 놀라 비명을 질렀고 미야모도는 반사적으로 권총을 뽑아들었다.

윤서경도 내심 놀랐지만 애써 태연함을 유지했다.

“세크메, 여전히 장난기가 심하구나.”

멀티비젼의 세크메가 다시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놀라셨다면 죄송해요. 스피커는 차단하겠습니다.”

“괜찮아. 테스트 현장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으니 볼륨을 더 올려도 돼.”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세크메가 볼륨 레벨을 올리자 좀비들의 괴성이 야수의 울부짖음처럼 관람실을 진동시켰다.

“카아아아!”

나오미는 겨우 진정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아직도 두려운 듯 숨소리가 높았다. 미야모도는 명색이 경비국장으로서 당혹스런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워 슬며시 권총을 집어넣었다.

검투장 같은 실험실에는 여섯 구의 좀비들이 괴성을 지르며 일본도를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여섯 구의 좀비들은 모두 긴좌에서 잡아들인 사무라이 좀비였다. 사무라이 좀비들은 여느 좀비들과 달리 동료 좀비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흉포함을 지녔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그로 인해 일본의 좀비 세계에서도 자연스럽게 위계질서가 조성되었다.

과거 일본의 전국시대 때 농민들을 지배하는 무사 계급처럼 사무라인 좀비들이 일반 좀비들을 통제하게 된 것이다.

그그긍…..!

다른 철장 문이 열리면서 십여 구의 좀비들이 괴성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비교적 건장한 체구의 좀비들은 살점이 심하게 뜯겨 있어 아주 흉측했다.

이들 좀비를 본 사무라이 좀비들이 일본도를 번득이면서 다가섰다.

“카우–카우!”

일반 좀비들은 수적으로도 많고 격투기 선수처럼 건장한 체구를 지녔지만 사무라이 좀비들을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일반 좀비들은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을 향해 사무라이 좀비들이 달려들면서 일본도를 휘둘렀다.

퍽, 퍽, 퍽–!

예리한 일본도에 잘린 일반 좀비들이 대가리와 팔다리가 떨어져나간 채 널브러졌다. 아무리 좀비라 해도 인간의 형상을 지녔기에 편안하게 관람하기에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나오미는 절로 치미는 욕지기를 참느라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하지만 윤서경은 이를 느긋하게 즐겼다.

“사무라이답게 죽어서도 훌륭한 전사가 되었군. 저것들을 어떻게 통제하지?”

“지부장님께서 직접 명령해 보십시오.”

후지쿠 박사는 윤서경에게 무선 마이크를 건네주었다.

윤서경은 마이크에 대고 짤막하게 지시했다.

“정지!”

그러자 사무라이 좀비들이 움찔하며 학살을 중단했다.

“크르르……!”

사무라이 좀비들은 이리저리 도피하는 일반 좀비들을 쏘아보기만 할 뿐 더는 공격하지 않았다.

윤서경은 흡족한 미소를 띠며 다시 지시했다.

“공격!”

명령을 받은 사무라이 좀비들이 다시 일반 좀비들을 쫓아가 참혹하게 난도했다. 궁지에 몰린 일반 좀비들이 괴성을 지르며 본능적으로 대들었지만 부질없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퍽, 퍽, 퍽!

사무라이 좀비들은 가차 없이 목을 베고 몸뚱이를 조각냈다.

“정지!”

또 다시 윤서경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무라이 좀비들은 내리치려던 일본도를 치켜든 채 석상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한데 애꾸 사무라이 좀비가 지시를 무시한 채 다시 공격을 펼쳐 일반 좀비의 몸을 벴다.

“정지! 정지!”

윤서경이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애꾸 사무라이 좀비는 도주하는 일반 좀비들을 쫓아가 무자비한 학살을 일삼았다.

후키쿠 박사는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세크메에게 지시했다.

“제거해.”

“예, 박사님.”

세크메는 실험실 내부에 설치돼 있는 화염방사기를 발사했다.

화르륵!

“크아아아!”

애꾸 사무라이 좀비는 처절하게 울부짖다가 이내 재로 변해 폭삭 내려앉았다.

후지쿠가 면구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지부장님. 컨트로슘은 아직 완성 단계가 아닙니다.”

“컨트로슘이 뭔가?”

“좀비 바이러스를 통제할 수 있는 물질입니다. 연구원들이 불철주야로 연구 중에 있지만 아시다시피 좀비 바이러스는 변이 과정을 예측하기 어려워……”

“이해하오. 그래도 사무라이 좀비를 일부 길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프로젝트는 성공적인 것 같군. 연구에 보다 전념토록 하시오.”

“고맙습니다, 지부장님.”

실험실의 사무라이 좀비들이 자신들의 구역으로 돌아가면서 테스트는 종료되었다.

윤서경은 멀티비젼의 세크메에게 물었다.

“세크메, 테임 프로젝트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해라.”

“예, 지부장. 테임 프로젝트는 사무라이 좀비를 이용해 대다수 좀비들을 통제하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유리전망창이 대형스크린으로 바뀌면서 3차원 영상이 상영되었다. 영상을 통해 아프리카 초원을 배경으로 임팔라를 사냥하는 암사자들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보여졌다.

“지구 곳곳에 널려 있는 수십 억 좀비들은 더 이상 인류를 위협할 요소가 아닙니다. 좀비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인류는 과거의 번영을 재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수많은 좀비들에게 투입할 약물을 대량으로 생산하기가 어렵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선발된 극소수 좀비들을 길들여서 하급 좀비들의 감시자로 만드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취지입니다.”

“흐음, 그러니까 사무라이 좀비들을 사자 떼처럼 최상위 포식자로 만들자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좀비들끼리는 서로 소통이 되기에 우리는 사무라이 좀비들을 통제하는 것으로 모든 좀비들을 노예처럼 부릴 수 있습니다. 물론 좀비들의 지능이 형편없기에 정밀한 기술을 요구할 수 없지만 잔해물을 치우고 땅을 일구는 단순 노동은 가능합니다.”

“고대 국가에서는 백성들 대부분을 노예로 부려먹었지. 하지만 아무리 좀비라도 영양이 공급되어야 생명이 유지되지 않겠느냐?”

“좀비들은 영양 공급 없이도 수개월은 활동할 수 있습니다. 사용 가치가 끝나면 폐기물로 처리돼 에너지로 재활용되지요. 좀비들의 사체는 화력발전소를 가동시킬 연료로 적합합니다. 악취 처리가 조금 고민이지만요.”

“좋아, 아주 좋아.”

윤서경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다.

“테임 프로젝트만 제대로 수행하면 메트로도쿄는 지구상 최고의 메가시티로 발전할 수 있다. 어쩌면 런던의 본사가 도쿄로 이주해 올 수도 있겠어. 너를 믿겠다, 세크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부장님.”

 2

윤서경은 일행은 후지쿠 박사의 배웅을 받으며 원형 통로를 나섰다. 그가 담배파이프를 입에 물자 나오미가 얼른 불을 붙여 주었다.

“미야모도 국장, 세크메를 믿을 수 있는가?”

“당연합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기계가 아닙니까. 기계는 배신할 수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야. 난 기계한테 배신을 당했지.”

“예……?”

“한국연구소의 메인컴퓨터인 테네시! 그 못된 것이 배신하는 바람에 서울의 엘리시움을 잃고 말았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본사에서는 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내게 메트로서울과 같은 메트로도쿄 건설을 지시했어. 일단 본사의 지시에 따르겠지만 메트로코가 건립되면 반드시 메트로서울을 제압해 복수할 생각이네.”

“지부장님이 복수하실 수 있게 성심을 다해 지원하겠습니다.”

“자네만 믿겠네, 미야모도 국장.”

윤서경은 USB를 미야모도에게 건넸다.

“이 안의 프로그램을 세크메에게 주입시키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 지시에 절대 복종하도록 프로그래밍하는 거네. 본사의 명령보다도 내 지시가 우선되어야 하지.”

“예에?”

미야모도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지부장님, 그것은 중대한 월권입니다. 만약 본사에서 이를 파악하기라도 하면 처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본사는 각 지부의 메인컴퓨터에서 전송되는 자료로만 판단하지. 본사의 요원들이 직접 찾아오지 않는 이상 절대 발각될 일은 없네.”

“하지만…….”

“전 소장인 가토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본사로 소환되었네. 나로서는 가토를 보좌한 사람들 역시 과오를 묻어 해임하고 싶은 심정일세.”

은근한 위협에 미야모도는 감히 반발하지 못하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윤서경은 미야모도의 어깨를 다독이며 덧붙였다.

“내 목표는 이곳에 메트로도쿄를 건립한 후 메트로서울과 베이징까지 연결하는 메트로시아 창설이네. 난 자네의 동참을 기대하겠네.”

미야모도는 차렷 자세를 취하고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지사장님. 충성을 맹세합니다.”

애니그마 일본연구소는 도쿄 북쪽의 첨단기업 연구단지 내에 자리하고 있는데 연구소 주변으로 넓은 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연구소 남쪽으로는 개울이 흐르고 울창한 수림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한국연구소와 달리 경관이 수려했다.

과거였다면 개울과 수림을 따라 느긋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전혀 즐길 수가 없었다. 높은 담장 밖을 어슬렁거리는 좀비들이 인간들의 피와 살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서경의 집무실은 연구소 건물 최상층에 마련돼 있기에 전망이 훌륭했다. 또한 시야를 가리는 고층 빌딩이 없기에 도쿄의 도심까지 조망이 가능했다.

윤서경은 팔짱을 낀 채 전망창을 통해 도쿄 도심을 바라보았다.

‘앙드레 김… 네놈은 메트로서울이나 잘 관리하고 있어라. 조만한 접수하러 할 테니까!’

이때 책상 위의 인터폰이 울렸다.

삐익!

윤서경이 집무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뭐지, 나오미?”

“오자키 보스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지부장님께 비밀스런 회동을 요구했습니다.”

오자키는 야쿠사 5대 조직 중 하나인 스미요시가이의 보스이다. 일전에 야쿠사 보스들과의 회합에서 치료제를 미끼로 비밀회동을 제안했는데 결국 걸려든 것 같았다.

윤서경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 오늘 당장 만나겠다. 시간과 장소를 정해.”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인터폰이 꺼지며 나오미의 모습이 사라졌다.

윤서경은 느긋하게 기대앉은 채 턱을 어루만졌다.

사무라이 좀비를 길들여 좀비 집단을 통제하는 테임 프로젝트, 오자키를 이용한 야쿠자 조직의 와해, 세크메의 완벽한 지배…….

그가 구상한 대로 도쿄와 서울, 베이징을 연결하는 메트로시아가 창설되면 굳이 본사의 방침에 따를 이유가 없었다. 그 자신이 아시아제국을 창설해 지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기존 질서는 파괴되었다. 신세계는 누가 먼저 좀비 집단을 통제하느냐에 따라 지배자가 정해진다. 아시아 대륙은 내가 접수할 수 있다!’

그가 이렇듯 원대한 야망을 품을 수 있게 된 것은 서울에서 엘리시움을 창건한 경험 덕분이었다.

엘리시움에서는 생존자들을 좀비들로부터 보호하면서 노예로 삼았지만, 테임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도쿄에서만 수백 만 구의 좀비들을 하급 노예로 삼을 수 있다. 생존한 인간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교육을 통해 중간 관리자로 써먹을 수 있으니 인간과 좀비가 공존하는 세상이 가능한 것이다.

윤서경은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혀로 입가를 훑었다.

‘충분한 전력과 자급 능력만 갖추면 메트로시아 창설도 결코 꿈은 아니다!’

이때 노크소리와 함께 미야모도가 들어섰다.

윤서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슈트를 챙겨 입었다.

탁자 앞으로 다가선 미야모도가 물었다.

“어디 출타하십니까?”

“오카지가 면담을 청해왔더군.”

“그러시군요… 지시하신대로 프로그램을 설치했지만 부팅을 새로 해야 세크메를 온전하게 통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부팅을 하게 되면 본사에서 이를 의심할 수 있습니다.”

“분명 의심하겠지. 새로운 프로그램이 어떻게 설정됐는지 분석하려 할 테고……”

윤서경은 뒷짐을 쥔 채 전망창 앞을 걸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멀리 보이는 시설을 보고는 한 가지 묘책을 떠올렸다.

“메인 전원을 차단하게. 모든 시스템이 차단된 후 자연스럽게 재부팅이 된 것처럼 처리하면 본사에서도 의심하지 않을 거네.”

“하지만 세크메에는 세 개의 전원 장치와 연결돼 있어 어떤 상황에서도 시스템이 차단되지 않도록 조치돼 있습니다.”

윤서경은 첨단기업연구단지에 전기를 공급하는 변전시설을 가리켰다.

“좀비들의 침입으로 인해 중앙 변전시설이 파괴되면 연구소 내의 모든 시스템이 마비될 거네. 물론 세크메는 즉각 자가 발전시스템을 통해 전원을 공급받겠지. 하지만 변전시설 파괴로 인한 과전류로 인해 전환시스템마저 고장 난다면 어디서도 전기를 공급받을 수 없어. 인위적인 재부팅을 피할 수 있으니 본사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이네.”

자칫 세크메의 데이터가 손상될 수 있는 위험한 방법이지만 미야모도는 윤서경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윤서경은 전망창을 거울삼아 넥타이를 고쳐 맸다.

“내가 출타한 상태에서 단전 조치를 실행하게. 본사에 대한 보고는 내가 돌아와서 하면 되니까.”

덜컹덜컹……!

3량짜리 지하철이 도에이신주쿠 선로를 따라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훌륭한 시설을 갖춘 도쿄 지하철이었지만 지금은 제대로 시설 보수가 되지 않아 운행이 위태로울 만큼 진동이 컸다.

3량짜리 지하철은 애니그마 일본연구소가 보유하고 있는 전용객차였다. 야쿠사 조직들이 13개의 지하철 노선을 나누어서 점유하고 있기에 전용객차는 첨단기업연구단지에서 하세가와 역까지만 운항된다.

객차 2량에는 무장한 경호요원들이 탑승해 있었다. 수십 명에 달하는 경호요원들이 이렇듯 한꺼번에 출동하기도 드문 경우였다.

윤서경은 나오미와 함께 가운데 객차에 탑승해 있었다.

객차 내에 몇몇 경호요원들이 동승해 있는데 긴장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윤서경이 유일했다.

윤서경이 나오미에게 여유롭게 말을 건넸다.

“나오미, 야쿠자 보스를 만나는 게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야?”

“야쿠자는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좀비 같은 자들입니다. 지부장님의 안위가 걱정스럽습니다.”

“경호요원들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윤서경은 손목에 차고 있는 스마트워치를 통해 시간을 살폈다.

이때 갑자기 터널 내부의 전원이 일제히 차단되며 객차마저 정지되었다.

끼이익!

나오미가 경호요원들에게 엄중히 지시했다.

“좀비들의 공격에 대비해! 목숨을 걸고 지부장님을 지켜야 한다!”

경호요원들은 출입문과 창문을 통해 외부를 살피면서 최고조의 경계태세를 유지했다.

스마트 워치를 통해 통화음이 들리자 윤서경이 통신기를 귀에 꽂았다.

“그래, 무슨 일인가 미야모도 국장.”

통신기를 통해 미야모도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큰일났습니다, 지부장님.”

“대체 무슨 일인가?”

“첨단기업단지 내의 변압기가 폭발해 연구소 내의 모든 전원이 차단되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좀비들이 변전시설을 공격했단 말인가?“

“현재 확인 중에 있지만 노후한 시설 때문에 폭발한 것 같습니다.”

“연구소의 안전에는 이상이 없는 건가?”

“예, 즉시 비상발전기를 가동해 보안 시스템은 재가동시켰습니다.”

“다행이군.”

“하지만 세크메를 재부팅시키기 위해서는 지부장님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알겠네. 매뉴얼에 따라 재부팅을 작업을 실시하게. 승인번호를 송신하겠네.”

“알겠습니다. 지금 전환시스템이 가동됐으니 메트로레인은 곧 복구될 겁니다.”

“좋아, 내가 귀환할 때까지 모든 시스템을 정상으로 환원시키게.”

통화를 마친 권현이 경호요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변압기 폭발로 잠시 전원이 차단됐다. 어쨌거나 메트로레인이 정차한 상태에서는 좀비들에게 습격당할 우려가 있으니 경계를 늦추지 마라.”

잠시 후 객차 내의 전등이 밝혀졌고 메트로레인이 다시 운행하기 시작했다. 경호요원들은 비로소 안도하며 비상경계를 해소했다.

윤서경은 스마트 워치를 통해 승인번호를 송신하고는 나오미에게 지시했다.

“비서실장은 각 부서장과 통화해서 연구소의 시스템 상태를 체크하고 세크메가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는지 확인하게.”

“예, 지부장님.”

나오미는 자리를 옮겨 연구소 내의 부서장들과 통화를 시작했다. 이 모든 상황은 부하들에게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한 윤서경의 연막전술이었다.

윤서경은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이제 세크메는 본사보다 내 명령에 우선적으로 복종하게 되었다!’

 3

오자키와의 회동 장소는 하세가와 환승역이었다.

오자키 역시 윤서경을 믿지 못하고 30명에 달하는 경호원들을 대동했다. 야쿠자 경호원들은 일본도와 총으로 무장한 채 오자키 뒤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윤서경에게 다가선 오자키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면담에 응해 주셔서 고맙소, 윤 총장.”

“오자키 보스와 다시 만나리라 짐작했소.”

“자, 들어갑시다.”

회담 장소는 환승역 중앙에 위치한 역무원실이었다. 본래 잡동사니로 가득했지만 오자키가 부하들을 시켜 테이블과 의자를 세팅해 놓았기에 아담하면서도 깔끔하게 바뀌어 있었다.

중요한 밀담이다 보니 윤서경은 나오미만 대동했고 오자키도 오른팔 격인 행동대장 우에하라 한 명만 대동해 회담에 임했다.

“한 대 피우시겠소?”

“아니, 됐소.”

윤서경이 시가를 건넸지만 오자키는 자신의 담배를 빼물었고 우에하라가 얼른 라이터를 켜주었다.

윤서경이 담배파이프를 물자 나오미가 지퍼라이타로 불을 붙였다.

“오자키 보스, 내 의사는 지난번 보스들과의 회담에서 충분히 밝혔소. 이제 오자키 보스만 결정하면 메트로도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소.”

“그 전에 치료제부터 확인하고 싶소.”

“좀비 바이러스 치료제는 배양이 어려워 수량이 한정돼 있소. 일단 두 개의 서바이벌 앰플을 선물하겠소.”

윤서경이 눈짓을 보내자 나오미는 핸드백에서 납작한 알루미늄 케이스를 꺼내 오자키에게 건넸다.

오자키는 케이스를 열어 2개의 서바이벌 앰플을 확인했다. 고작 2개뿐이기에 아쉬웠지만 그래도 좀비 바이러스 치료제를 지녔다는 것만으로 생명 하나를 더 확보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오자키는 품속 깊숙이 케이스를 넣었다.

“지부장, 서바이벌 앰플을 미리 주사하면 좀비 바이러스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거요?”

“그건 치료제이지 백신이 아니오. 또한 한번 좀비 바이러스를 치료했다고 하여 면역이 되는 것도 아니니 신중하게 사용해야 할 거요.”

“만일 우리 조직이 지부장과 협력하면 충분한 분량의 치료제를 보장해 줄 수 있소?”

“충분한 분량은 약속할 수 없지만 스미요시가이의 감염된 수하들을 구할 수 있을 정도는 제공될 거요.”

오자키는 힐끗 우에하라를 보았다.

2미터에 가까운 거구의 우에하라는 얼굴 곳곳에 칼자국까지 새겨져 있어 대면하는 것만으로 상대에게 두려움을 안겨준다. 그가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오자키가 비밀협정을 제안했다.

“좋소. 야쿠자 오대조직에 의해 분할돼 있는 메트로레인의 통합에 적극 협조하겠소. 대신 윤 총장 역시 약속을 지켜야 할 거요.”

윤서경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뿜었다.

“물론이오, 지난번 밝힌 대로 나는 메트로도쿄와 서울, 베이징을 연결하는 메트로시아 창설에 내 평생을 바치고자 하오. 오자키 보스가 메트로도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준다면 나로서도 고마운 일인데 어떻게 배신할 수 있겠소?”

“그럼 윤 총장을 믿겠소. 내가 어떻게 도우면 되겠소?”

“도쿄의 메트로레인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야마구치 조직부터 와해시켜야 하오. 나카지마만 쓰러뜨리면 나머지 삼대 보스는 자연스럽게 오자키 보스를 오야붕으로 섬기게 될 거요.”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소? 야마구치는 사대조직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한 전력으로 무장돼 있소. 애니그마 연구소의 경비대가 얼마나 강력한 군대인지 몰라도 야마구치와 맞섰다가는 대번에 박살날 거요.”

윤서경은 의자에 편히 기대앉았다.

“야마구치 조직원들도 종래에는 오자키 보스가 거느려야 할 전사들이 아니오? 내 목표는 나카지마를 비롯한 구역장들만 제거하는 거요. 나머지는 오자키 보스가 처리할 수 있지 않겠소?”

오자키가 재떨이에 담배를 끄며 실소를 흘렸다.

“크흣, 야마구치 본부를 박살내려면 중무장한 대대 병력과 화력이 필요하오. 대체 윤 총장이 무슨 수로 나카지마를 제거할 수 있단 말이오?”

“그건 내가 해결할 문제이니 오자키 보스는 야마구치에 관한 모든 정보만 제공해 주시면 되오.”

“그건 어렵지 않지만… 만일 실패하면 우리 조직이 위태롭게 될 거요.”

“실패할 일은 절대 없을 거요.”

윤서경이 결연하게 말하자 오자키도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미소를 띠며 악수를 청했다.

“좋소. 협정이 체결됐으니 우리는 한 배를 탄 동료요.”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셔서 고맙소. 메트로도쿄의 창설, 나아가서 일본의 재건은 이제 오자키 보스의 어깨에 달려 있소.”

윤서경은 오자키를 한껏 추켜세워 주었다.

오자키는 자신이 새롭게 재건된 일본의 지배자가 되는 즐거운 공상을 하며 역무원실을 나갔다.

윤서경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오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부장님, 연구소의 경비대 전력으로는 야마구치를 공격하는 게 불가합니다. 가또 전 소장도 한때 야쿠자 조직과 맞섰다가 실패했음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알아. 가또의 실패 덕분에 내가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게 됐어.”

윤서경은 나오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리한테는 절대 쓰러지지 않는 불사의 군대가 있는데 왜 야마구치 따위를 두려워하겠는가?”

Written by : Mich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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