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ré’s Choice: In a Broken World”

“heroic sacrifice”

장렬한 희생

서울역 사장 집무실.

“보안국장한테 정말 실망했어. 당당히 맞서서 공멸할 줄 알았는데 비겁하게 퇴각이라니.”

밀터비전을 통해 충무로역내의 전투 상황을 지켜본 윤서경 사장는 별반 분노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와중에서 와인을 입에 머금으면서 향취를 즐겼다.

경호국장 황해가 탁자 앞으로 다가섰다.

“사장님, 제가 출동해서 헬돔의 버러지들을 쓸어버리겠습니다.”

“자네가 나설 상황이 아니라고 했잖은가?”

“하지만 이미 충무로역 전투에서 패한 상황이라 백 국장이 명동역을 지킬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명동역 방어선이 무너지면 놈들은 회현역을 통과해 곧바로 서울역에 이르게 됩니다. 놈들이 서울역으로 침투하면 엘리시움 전체가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또한 그래서도 안 되고.”

자리에서 일어선 윤서경은 전망창으로 다가섰다.

넓은 서울역 광장에는 좀비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한낮이기에 그 숫자가 많지 않았지만 흉물스런 모습이 역겹기만 했다.

‘그동안 헬돔을 너무 키웠어. 좀비 사냥이나 즐기라고 내버려 두었더니 감히 엘리시움을 위협하다니.’

엘리시움은 애니그마 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창설될 수 있었다.

세계의 대도시 중에서 이렇듯 메트로레인이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는 도시는 많지 않다. 더군다나 메트로레인을 통해 이동할 수 있는 수십 개의 서브시티를 보유하고 있는 도시는 몇 개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엘리시움이다.

이런 공적 덕분에 그는 애니그마 연구소의 동아시아 지부장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엘리시움이 붕괴된다면 그의 지위 또한 박탈될 것이며 목숨 또한 보존하기 어렵다.

윤서경 사장는 창가에서 천천히 돌아섰다.

“경호국장, 당장 다음 작전을 실행하게.”

황해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사장님, 꼭 그러실 필요는…….”

“실행해. 그리고 분명히 주지하지만 이번 작전은 백인호의 독단적인 결정일세. 모든 공과는 백인호가 짊어지고 가야 돼. 엘리시움을 위하여.”

명동역 터널 쪽으로 퇴각한 백인호는 참담한 패배를 곱씹어야 했다.

이번 전투를 위해 보안대원들 중에서 선발한 중대급 정예부대를 동원했기에 헬돔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자신했었다. 헬돔의 전투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상대가 고작 10명에 불과했기에 패배는 생각지 않은 그였다.

매설한 크레모어로 선제타격을 가한 후 돌격을 감행한 그의 전술은 완벽했다. 더군다나 강력한 서치라이트로 시야를 확보했기에 하대수 일행의 몰살은 시간문제였다.

한데 앙드레에 의해 서치라이트가 박살나고 천장에서 가해지는 위협사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무엇보다 수적으로 우세한 보안대원들이 헬돔의 기세에 눌려 도주했으니 그의 작전은 어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함께 피신한 부하들을 점검해 보니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중 일부는 부상을 당해 전투를 치를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엘리시움의 보안국장을 맡은 이후 이런 참패는 처음이었기에 충격이 더했다.

이런 상황이면 본사에 지원과 보급을 요청해야 했지만 과연 윤서경이 지원을 보내줄 지도 의문이었다.

이때 귀에 꽂은 무선 통신기를 통해 의무대장의 보고가 들려왔다.

“국장님, 저 의무대장 송현입니다.”

“그래, 부상자 수습은 제대로 처리되고 있나?”

“그렇습니다. 하대수 사령관이 이렇듯 호의를 베풀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부상자는 많아도 예상과 달리 전사자는 적었습니다. 헬돔에서 학살을 자행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

“한데 하대수 사령관이 협상을 청해왔습니다.”

“협상이라고?”

“예, 전투를 속히 끝내고 싶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잠시 고민하던 백인호는 부상을 당해 신음하고 있는 보안요원들을 쓸어보고는 협상을 수락했다.

“알겠네. 만나겠다고 전해.”

교신을 마친 백인호가 보안국 부국장인 손동필을 호출했다.

“잠시 하대수를 만나고 오겠다.”

“지금 전투중입니다.”

“알아. 전투중이라도 협상은 가질 수 있다.”

“제가 수행하겠습니다.”

“아니야. 나 혼자 가겠다.”

백인호는 권총 한 자루만 지닌 채 충무로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대수는 강철민만 대동해 명동역 방향의 터널로 들어섰다.

이를 지켜보던 요아가 우려의 기색을 띠었다.

“정말 괜찮을까?”

김석현이 팔짱을 낀 채 말을 받았다.

“윤서경은 지저분한 놈이지만 백인호는 믿어도 돼. 군인 출신답게 명예는 아는 자이니까.”

“협상이 잘 됐으면 좋겠어. 솔직히 허접한 보안대원들을 죽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래서 사령관이 나선 거잖아?”

몸을 돌린 김석현이 전사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진군 준비해! 운이 따르면 서울역까지 간식을 먹으며 행군할 수 있다!”

요아는 승강장에 기대서며 푸념했다.

“역시 같은 인간을 죽이는 건 기분이 찜찜해. 좀비들은 수백 구를 죽여도 통쾌하기만 했는데 말이야.”

앙드레가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좀비는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일 뿐이야. 인간과는 확실히 다르지. 지금은 인간끼리 싸울 상황이 아니야.”

요아는 터널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협상이 잘 됐으면 좋겠어.”

200미터 정도를 들어가자 터널은 급격한 커브를 그리며 휘어져 있었다.

“백인호, 나 하대수다!”

휘어진 터널 안쪽에서 백인호의 음성이 들려왔다.

“용건이 뭐요, 사령관?”

“싸움을 끝내고 싶지 않은가?”

“…….”

“뭐, 계속 싸우겠다면 우리는 돌아가겠다!”

하대수과 강철민이 돌아서려 하자 백인호의 외침이 들려왔다.

“잠깐. 기다려!”

백인호가 휘어진 터널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손에 쥔 권총을 뒤로 던졌다. 무장을 하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양측은 천천히 접근해서 마주 섰다.

백인호가 경계의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요구 조건이 뭐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만 투항해. 무의미한 싸움을 끝내자.”

“허튼소리 마시오. 엘리시움을 지키는 것이 보안국장으로서의 내 임무요. 난 명예롭게 죽을 준비가 돼 있소.”

“이봐, 백인호. 우리의 적은 좀비야. 헬돔과 엘리시움은 싸우는 방식이 달라도 목표는 좀비들을 몰아내는 거라고.”

“좀비가 공동의 적이라는 얘기는 인정하오. 헬돔이 강압적으로 침범하지만 않으면 엘리시움이 통제하는 서브시티는 안전할 수 있소.”

“자네 정말 엘리시움이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시민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윤서경 같은 새끼를 제왕처럼 떠받는 게 명예로운 임무냐고!”

“…….”

백인호는 잠시 고심하다가 하대수에게 물었다.

“사령관, 진실을 알고 싶소.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좀비 바이러스가 정말 애니그마 연구소에서 생성된 거요?”

“앙드레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는 오래전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가 애니그마 연구소에서 치료를 받아 치료됐다고 하더군.”

“치료가 됐단 말이오? 좀비 바이러스는 치료제가 없다고 들었는데?”

“좀비 바이러스를 개발한 놈들이니 치료할 수 있었던 거 아니겠나?”

강철민의 표정이 심한 갈등으로 일그러졌다.

“한 가지 더… 엘리시움이 레포로마 사의 지원을 받아 창설됐다는 말도 사실이오?”

“나도 그 점은 반신반의했네. 하지만 윤서경이 자네를 보내 우리를 죽이려 했다는 데서 확신했지. 놈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입을 막으려 한 거네. 자네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놈의 무도한 명령을 재고해야 마땅해.”

“……..”

백인호가 답변을 유보하자 하대수가 시가를 빼물었다.

“오 분을 주지. 우리 헬돔의 전사들이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것은 잘 알 거네.”

이때 백인호의 귀에 꽂힌 무선 통신기를 통해 의무국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국장님, 본사에서 긴급 대피 명령이 하달됐습니다.”

“긴급 대피 명령이라니?”

“충무로역의 출입구가 개방된다고 합니다.”

“뭐라고?”

백인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건 좀비들을 역내로 들이겠다는 거잖아? 대체 어떤 새끼가 그런 터무니없는 명령을 하달해?”

“본사의 지시에 의하면 보안국장님의 지시사항이라고 했습니다.”

“뭐, 뭐야?”

“본사 중앙통제실에서 자동으로 차폐문을 개방하기에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좀비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속히 피신하십시오.”

교신이 끊기자 백인호는 참담한 심정에 죽고만 싶었다.

Written by : Mich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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