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달콤한 함정
“1, 7, 13, 19, 25, 31번이 맞나?”
강현우는 관악구 서울대입구역 근처 로또 판매점에서 복권을 구매하며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맞아. 그리고 보너스 번호 37. 틀림없어.]
사라의 목소리가 확신에 차 있었다.
“5천원어치만 사는 게 맞지?”
[응. 너무 많이 사면 의심받을 수도 있어. 그리고 어차피 하나만 맞춰도 18억이잖아.]
강현우는 긴장하며 로또 용지를 작성했다. 25년 후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18억을 당첨받을 생각을 하니 심장이 뛰었다.
“학생, 이거 맞게 표시한 거야?” 판매점 아주머니가 물었다.
“네, 맞습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컴퓨터로 번호 뽑는데, 직접 쓰는 건 처음 보네.”
“그냥… 의미 있는 번호라서요.”
강현우는 로또를 받고 지갑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내일 저녁 추첨이니까 이틀 후면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우야, 긴장 풀어. 이미 확정된 미래야.]
‘그래도 신기해. 18억을 그냥 받는다는 게.’
[그것보다 지금 더 신경 써야 할 게 있어. 이은미와의 데이트.]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50분이었다. 강남역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타고 40분 정도 걸린다.
“늦었다!”
강현우는 뛰어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 강남역 2번 출구 —
오후 2시 10분.
“현우야! 여기!”
강남역 2번 출구에서 이은미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그녀는 뭔가 달랐다.
평소보다 훨씬 신경 써서 차려입었다. 검은색 원피스에 하이힐, 그리고 살짝 화장까지. 마치 특별한 날인 것처럼.
“미안, 늦었어.”
“괜찮아. 나도 방금 왔어.” 이은미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옷 괜찮아? 좀 더 신경 쓰고 올 걸 그랬나?”
강현우는 자신의 평범한 청바지와 티셔츠를 내려다봤다.
[어? 이은미가 네 외모에 뭔가 기대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미안, 뭔지 몰라서…”
“에이, 농담이야.” 이은미가 강현우의 팔을 끼었다. “이런 게 더 자연스럽고 좋아.”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강현우를 평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디 가려고?”
“일단 백화점부터. 쇼핑하면서 얘기하자.”
두 사람은 강남 한복판의 대형 백화점으로 향했다. 2004년의 강남은 지금보다는 덜 화려했지만, 여전히 서울의 중심지였다.
“현우야, 요즘 용돈은 어때?”
백화점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이은미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용돈? 그냥 보통이야.”
“보통이 얼마?”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강현우는 잠시 당황했다.
[조심해. 이게 테스트일 수도 있어.]
“한 달에 30만원 정도?”
“30만원?” 이은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좀 빠듯하겠네.”
“그래?”
“응. 여자친구 있으면 돈 많이 들거든.”
이은미가 강현우를 빤히 바라봤다.
“혹시 아르바이트는 안 해?”
“생각은 하고 있어.”
“그래? 그럼 내가 좋은 거 하나 추천해줄까?”
[현우야, 이상해. 왜 갑자기 네 경제 상황에 관심을 가지지?]
“무슨 아르바이트?”
“우리 아빠 회사에서 대학생 인턴을 뽑는대. 시급도 괜찮고.”
“너 아빠 회사?”
“응. 금융 쪽이야.” 이은미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관심 있으면 소개해줄게.”
강현우는 소름이 돋았다. 이은미 아버지가 금융업계 인물이라는 것은 25년 후에야 알았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20살의 이은미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정보를 흘리고 있었다.
[이건 확실히 의도적이야. 너를 그쪽 업계로 끌어들이려는 것 같아.]
“고마워. 생각해볼게.”
“그래? 좋은 기회일 거야.” 이은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5층 여성복 매장에 도착했다.
“현우야, 내가 이거 입는 거 어떨 것 같아?”
이은미가 파격적인 미니드레스를 들고 물었다. 검은색이지만 가슴 부분이 깊게 파인 디자인이었다.
“그거… 좀 노출이 심한 것 같은데.”
“그런가?” 이은미가 웃었다. “남자들은 이런 거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오, 직접적으로 유혹하기 시작했네.]
“나는 네가 뭘 입든 예뻐.”
“정말?” 이은미가 강현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럼 이거 사줄래?”
“얼마야?”
“50만원.”
강현우는 깜짝 놀랐다. 한 달 용돈보다 비싼 옷이었다.
“50만원?”
“비싸?” 이은미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됐어.”
[현우야, 이건 완전히 테스트야. 네 경제력을 측정하고 있어.]
“아니야, 사줄게.”
강현우는 결심했다. 어차피 이틀 후면 18억이 생길 텐데.
“정말? 고마워!” 이은미가 기뻐하며 강현우의 뺨에 뽀뽀했다. “사랑해!”
계산을 하면서 강현우는 통장 잔고를 걱정했다. 이번 달은 라면으로 버텨야 할 것 같았다.
[현우야, 카드 긁는 모습이 좀 초라해 보여.]
‘어쩔 수 없잖아. 아직 로또 당첨 전인데.’
[그런데 이은미가 널 보는 눈빛이 묘해. 동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계산하는 것 같고.]
“고마워, 현우야.” 이은미가 쇼핑백을 받으며 말했다. “이제 내가 선물 줄 차례네.”
“무슨 선물?”
“따라와.”
이은미가 강현우의 손을 잡고 백화점을 나섰다.
— 강남 모텔가 —
“여기가… 어디야?”
이은미가 데려간 곳은 강남역 뒷골목의 모텔가였다.
“선물이 뭔지 궁금하지?” 이은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현우야, 설마…]
“은미야, 이게 무슨…”
“오늘 우리 생일이잖아.”
“생일? 누구 생일?”
“우리가 사귄 지 100일.”
강현우는 당황했다. 25년 전 기억으로는 100일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아… 맞다.”
“그래서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어.” 이은미가 모텔 입구를 가리켰다. “우리만의 시간.”
[와, 대담한데? 20살 여대생이 직접 모텔을 제안하다니.]
“은미야, 우리가 아직…”
“뭐가 아직이야?” 이은미가 강현우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우리 사귄 지 100일인데.”
그녀의 몸이 강현우에게 밀착되었다. 부드러운 감촉과 향수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현우야, 심장박동수가 급격히 올라가고 있어.]
“하지만…”
“하지만 뭐?” 이은미가 강현우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나랑 있기 싫어?”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뭐가 문제야?” 이은미의 목소리가 약간 차갑게 변했다. “혹시 다른 여자 있어?”
[현우야, 이건 확실히 테스트야. 대답 조심해.]
“다른 여자는 무슨. 너밖에 없어.”
“그럼?” 이은미가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싫은 거야?”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뭐?”
강현우는 정말로 당황했다. 47살의 경험으로는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현우야, 솔직히 말해봐. 하고 싶어?]
‘그야 당연히…’
[그럼 왜 망설여? 어차피 네 여자친구잖아.]
‘뭔가 계산된 것 같아서.’
[그게 뭐가 어때? 계산된 거라도 즐기면 되지.]
사라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좋아.”
“정말?” 이은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가자.”
— 모텔 방 안 —
“와, 생각보다 깔끔하네.”
이은미가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강남역 근처라서 그런지 시설이 괜찮았다.
“음료수 뭐 마실래?” 이은미가 냉장고를 열었다.
“아무거나.”
강현우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22살 몸의 호르몬이 들끓고 있었지만, 동시에 47살 경험으로는 뭔가 이상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우야, 긴장하지 마. 자연스럽게 해.]
‘자연스럽게라니, 이런 상황이 자연스러워?’
[20살 여대생이 모텔을 제안하는 게 이상하긴 해. 하지만 즐기라고.]
이은미가 맥주 두 캔을 가지고 왔다.
“건배!”
“뭘 위해서?”
“우리 미래를 위해서.”
이상한 표현이었다. ‘100일 기념’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라니.
[현우야, 저 표현 이상하지 않아? 마치 뭔가 계획이 있는 것 같은.]
맥주를 마신 후 이은미가 강현우 옆에 앉았다.
“현우야.”
“응?”
“나랑 미래에 대한 얘기 해본 적 있나?”
“미래?”
“응. 졸업하고 뭐 할 건지, 어떤 회사에 들어갈 건지.”
또 다시 진로에 대한 질문이었다.
“아직 확실하지 않아.”
“그래?” 이은미가 강현우의 손을 잡았다. “나는 확실한 계획이 있어.”
“어떤 계획?”
“졸업하고 해외에서 MBA 받고, 그 다음엔 큰 회사에서 일하는 거.”
20살 여대생치고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야심찬 계획이었다.
“대단하네.”
“너도 같이 하지 않을래?”
“같이?”
“응. 우리 둘 다 해외로 나가서 공부하고, 그 다음엔…”
이은미가 강현우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다음엔?”
“결혼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결혼 얘기에 강현우는 당황했다.
[현우야, 이거 완전히 미끼야. 너를 자기 계획에 포함시키려고 하고 있어.]
“결혼?”
“왜? 싫어?” 이은미가 강현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나랑 결혼하기 싫어?”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과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싫지 않지만…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아.”
“그래?” 이은미가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미리 계획은 세워둬야 하잖아.”
그녀가 강현우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은미야…”
“응?”
“너 정말 나를 사랑해?”
이은미의 손이 잠시 멈췄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그냥… 궁금해서.”
이은미가 잠시 강현우를 바라보더니 웃었다.
“바보야.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사랑 안 하겠어?”
하지만 그 웃음에는 뭔가 계산적인 것이 숨어 있었다.
[현우야, 저 웃음은 진짜가 아니야. 하지만 지금은 그냥 즐겨.]
“사랑해, 은미야.”
“나도 사랑해.”
이은미가 강현우에게 키스했다. 이번에는 오후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현우야, 이제 진짜 시작이야. 준비됐어?]
사라의 목소리에 묘한 흥분이 섞여 있었다.
강현우는 이은미를 껴안으며 생각했다.
이것이 사랑인지, 계산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22살 청년의 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명확했다.
그리고 47살의 경험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현우야, 즐기라고. 나는 여기서 모든 걸 다 보고 있을 테니까.]
사라의 매조히즘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강현우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진짜든 가짜든,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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