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ré’s Choice: In a Broken World”
“The Untrustworthy Ones Are Humans”
3
첨단기업연구단지 역답게 플랫홈이 근사했다.
지상이 좀비들의 세상으로 바뀐 상황에서도 역내는 전혀 훼손되지 않았기에 도심의 역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스크린도어가 열리자 이나가와카이의 보스 하세가와는 십여 명의 경호원들을 대동해 객차에서 내렸다.
플랫홈에는 경비국장 미야모도가 경비대원 몇 명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하세가와 보스.”
“다시 만나 반갑소, 미야모도 국장.”
“우리 연구소에는 처음이신가?”
“그렇소. 역이 정말 훌륭하군.”
하세가와는 깨끗하게 환한 플랫홈을 둘러보며 진심 어린 감탄을 발했다.
“도쿄의 메트로레인 어디에도 이런 역은 없을 거요.”
“가십시다. 지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미야모도는 하세가와 일행과 함께 연구소 지하로 이어지는 연결통로로 들어섰다.
연결통로는 곧장 엘리베이터로 이어졌다. 대형 엘리베이터는 족히 스무 명이 한꺼번에 탑승할 수 있을 만큼 컸기에 미야모도와 하세가와의 부하들 모두가 함께 오를 수 있었다.
기이잉……!
대형 엘리베이터는 거의 소음도 발하지 않고 상승했다. 한쪽 벽이 통유리인 전망 엘리베이터이기에 외부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하세가와는 근사한 조경이 갖춰진 연구소의 넓은 부지에 감탄했고, 견고한 방벽 너머로 득실대는 연대급 좀비들의 숫자에 놀랐다.
“웬 좀비들이 이렇게 많은 거요?”
“전혀 두려워하지 마시오. 우리 애니그마 연구소의 외곽 경비부대일 뿐이니까.”
“그래도 좀비잖소?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 너무 신뢰하지 마시오.”
“하세가와 보스, 쇼군 좀비는 지부장님이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되오.”
엘리베이터는 7층에서 열렸다.
“보스의 부하들을 위해 시원한 맥주를 준비해 놓았소. 지부장님을 면담하는 동안 한잔씩들 마시면 될 거요.”
하세가와는 경호원을 한 명도 대동하지 못하는 것이 조금 켕겼지만 윤서경을 믿기로 했다.
‘그래, 나한테 좀비 바이러스 치료제까지 선사했는데 이제 와서 배신하겠어?’
그는 조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래, 한잔씩 마시면서 대기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예, 보스.”
조직원들은 경비대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나갔다.
엘리베이터는 2개 층을 더 상승해서 다시 멈췄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나오미가 보였다.
“오서 오세요, 보스.”
“오, 나오미 비서실장. 여기서 보니 더 아름답군.”
하세가와는 나오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과찬이세요. 가시죠.”
나오미는 두 사람을 지부장실로 안내했다.
나오미와 미야모도는 바깥에서 대기했고 하세가와만 집무실로 들어갔다.
대형 스피커에서 은은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금은 처연함이 느껴지는 일본 전통 음악이었다.
“하하! 어서 오게나, 하세가와 보스.”
윤서경은 벽 앞에서 와인을 고르고 있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벌집 같은 저장고에는 수백 병에 달하는 와인들이 진열돼 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이렇듯 방대한 양의 와인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사치였다.
하세가와는 윤서경을 대할 때마다 주눅이 들어 이제는 오야붕처럼 생각되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부장님.”
“앉게나. 참, 하세가와 보스는 어떤 취향의 와인을 좋아하는가?”
“제대로 된 와인을 마셔본 지는 오래 됐습니다. 예전에 마고인가 하는 와인을 맛있게 마신 기억이 나는군요.”
“아, 샤토 마고. 1992년산 샤토 마고라면 그래도 마실 만하네. 하지만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에는 부족하지. 자네에게는 특별히 1975년산 샤토 무똥을 대접하고 싶네.”
“좋습니다. 제가 와인에 대해서는 해박하지 못해서…….”
“최고급 와인은 맛과 향이 월등해 저절로 느끼게 될 거네.”
윤서경은 능숙하게 코르크 마개를 따고는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건배.”
창가 탁자에 마주앉은 두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샤토 무똥을 마신 하세가와는 그윽한 향기와 깊은 맛에 절로 감탄을 발했다.
“하아, 스바라시(훌륭합니다)!”
“마실 만하다니 다행이군.”
윤서경은 하세가와에게 담배를 권하고는 자신은 파이프담배를 피웠다.
“그래, 아이스고데츠와 마츠바카이의 병합은 얼마나 추진되었는가?”
“그게… 문제가 조금 생겼습니다.”
“문제라니?”
“가미카제가 도심의 서브시티로 대거 이주해 왔습니다.”
윤서경이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야쿠자 조직에서 순순히 구역을 내줬단 말인가?”
“야마구찌의 구역장들이 오야봉의 복수를 위해 가미카제와 연대하는 바람에 시노부라와 요시모토도 동조하고 말았습니다.”
“앙드레 패거리들한테 눌린 건 아니고?”
“솔직히 하메시란 계집애가 쇼군 좀비를 쓰러뜨린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럼 하세가와 보스가 한 게 없군.”
윤서경이 실망스런 기색을 표하자 하세가와는 자세를 바로 했다.
“지부장님, 쇼군 좀비만 내주신다면 메트로레인을 통합해 지부장님께 바치겠습니다.”
“자네는 쇼군 좀비를 다룰 수 없네. 오직 나만 쇼군 좀비를 통제할 수 있지.”
“그럼 사무라이 좀비라도… 오자키가 사무라이 좀비를 앞세워 야마구찌 구역을 제압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윤서경은 담배파이프를 피우며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단 가미카제의 동향을 파악한 후 결정을 내리겠네.”
그는 와인 병을 하세가와에게 내밀었다.
“나머지는 가져가서 마시게.”
이만 나가라는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하세가와가 정중하게 몸을 숙였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지부장님.”
“멀리 나가지 않겠네.”
윤서경은 일어서지도 않은 채 간단한 손짓만으로 보냈다.
하세가와는 몹시 자존심이 상했지만 공손함을 유지했다. 기존 야쿠자 조직들과 등을 진 상황이라 이제는 윤서경의 지원 없이는 조직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세가와가 나가자 곧바로 미야모도가 들어섰다.
“지부장님, 이나가와카이가 야쿠자 조직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 같습니다.”
“나도 얘기 들었네. 역시 하세가와가 야쿠자 보스 중에서 서열이 뒤쳐진 이유가 있었어. 다른 야쿠자 조직들을 복속시킬 카리스마가 없는 자야.”
“하세가와마저 가미카제와 동조한다면 전투가 쉽지 않습니다. 차라리 미리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 하세가와는 쇼군 좀비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니 배신하지 않을 것이네. 일단 놈들의 동향부터 살피게. 한번의 승부로 결판을 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미야모도가 나가자 윤서경은 원격으로 후지쿠 박사를 호출했다.
“박사, 삼일 이내에 사무라이 좀비들의 훈련을 끝내시오.”
“무리입니다, 지부장님. 과도한 콘트로슘 투여로 자칫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니, 삼일은 너무 길군. 이틀 내에 끝내도록 하시오. 어차피 약물보다 음파로 조종하는 거니 문제될 거 없소.”
“그러다 음파 조종 장치가 불능이라도 되면…….”
“박사!”
윤서경은 스크린의 후지쿠를 향해 엄중하게 말했다.
“박사가 쇼군 좀비를 잘못 관리하는 바람에 아까운 간호사가 둘이나 죽었소. 한데도 난 박사에게 전혀 죄를 묻지 않았소. 그러나 이틀 이내에 사무라이 좀비들의 훈련을 마치지 못하면 이번에는 박사의 임무 수행 능력을 의심하게 될 거요. 무슨 말인지 알겠소?”
후지쿠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잘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원격 교신이 끊기면서 스크린이 꺼졌다.
집무 책상으로 다가선 윤서경은 도쿄의 메트로레인 지도를 상세하게 살폈다. 막강한 좀비 군단을 보유한 그로서는 누구도 두렵지 않았다.
‘세상에 믿을 수 없는 게 인간이다. 하지만 좀비는 배신하지 않지. 좀비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최강의 전사이자 최고의 일꾼이 될 것이다.’
4
애니그마 일본연구소 건물이 멀리 보였다.
첨단기업연구단지 내에는 초고층 빌딩들이 없기에 1km밖에서도 애니그마 연구소를 관찰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앙드레와 요아는 미국계 ICT기업인 오라클 연구소의 빌딩 옥상에서 애니그마 연구소를 살피고 있었다.
오라클 연구소는 수년 전 좀비들에 의해 점거되었기에 연구원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건물 복도에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배회하는 좀비들만 가끔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바이크를 타고 오라클 연구소에 이른 두 사람은 좀비들과 격투 한번 하지 않고 무난히 옥상에 오를 수 있었다.
요아는 망원렌즈 카메라로 애니그마 연구소와 주변의 설비들을 촬영했다.
“와아, 졸라 많네.”
요아는 잠시 촬영을 멈추고 담배를 빼물었다.
그녀가 푸념을 할 만큼 애니그마 연구소 주변은 수천의 좀비들로 득실거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좀비들이 하나둘씩 계속해서 애니그마 연구소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서고 있었다.
“크어어어!”
방책 밖에서 일반 좀비들을 통제하는 존재는 사무라이 좀비들이었다. 복장과 어울리지 않게 독일군 철모와 같은 헬멧을 착용한 사무라이 좀비들은 포악한 괴성을 지르면 일반 좀비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사무라이 좀비들이 뭐가 거슬리는지 일반 좀비들을 향해 수시로 칼을 휘둘렀다. 일반 좀비들은 그들에 의해 도륙을 당하면서도 누구 하나 대들지 못했다.
앙드레는 쌍원경으로 좀비들의 행동을 예의주시하다가 난간 구석에 기대앉았다.
“윤서경의 의도를 모르겠군. 연구소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지금도 충분한데 왜 계속해서 좀비들을 끌어들이는 거지?”
요아는 자신이 피우고 있던 담배를 앙드레의 입에 물려주었다.
“달리 이유가 있겠어? 졸개들이야 많을수록 좋은 거지.”
“단순히 방어적인 의미는 아니야.”
“아마 가미카제 본부를 기습했다가 쇼군 좀비가 쓰러지면서 꽤나 충격을 받았겠지. 윤서경 그 새끼가 겉으로만 대범한 척하지 의외로 겁이 많잖아?”
“마츠이 본부장 말로는 하세가와가 은밀하게 애니그마를 찾아가 윤서경을 만났다고 했어. 윤서경도 가미카제가 서브시티를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니 모종의 조치를 취할 거야.”
요아는 멀리 애니그마 연구소를 바라보며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어디 미사일 없나? 한방으로 연구소를 날려버리면 좀비 군단도 흩어질 텐데…….”
그러다 뭔가를 떠올린 듯 가볍게 손뼉을 쳤다.
“맞아! 서울에서도 좀비들이 불칸에너지를 공격하려 한 적 있었잖아? 도쿄에서도 발전소가 있을 거야. 발전소를 급습해서 전기를 차단하면 애니그마 놈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어.”
나름 훌륭한 전략이었지만 앙드레가 반대했다.
“안 돼. 애니그마 연구소는 구암연구소처럼 자가발전 시설을 갖추고 있어 전력이 차단돼도 큰 타격을 가하기 힘들어. 오히려 전력 공급이 끊기면 서브시티의 거주민들만 피해를 보게 될 거야. 서브시티는 전력이 없으면 하루도 버티기 힘들지.”
“예미, 그럼 어떻게 권가 놈을 죽이지? 우리의 존재를 확인했으니 밖으로 나서지도 않으려 할 텐데?”
“놈이 나오지 않으면 우리가 들어가는 수밖에.”
“말도 안 돼. 저 엄청난 좀비 군단을 무슨 수로 돌파해?”
요아는 한숨을 내쉬다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참, 우리한테는 하메시가 있지? 하메시를 앞세우면 전설의 칼 아오조라가 다시 기적을 일으킬 거야.”
“기적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아.”
앙드레는 애니그마 연구소를 직시하면서 분명하게 덧붙였다.
Written by : Mich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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