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ré’s Choice: In a Broken World”
“Hameshi”
하메시
일본 서부 후쿠이현.
후쿠이현 서해안에 형성된 미치구치 해수욕장이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예전의 세상이었다면 청춘남녀와 가족들로 북적였을 미치구치 해수욕장이지만 지금은 아무리 눈을 씻어도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생명체가 말살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해수욕장 기능을 상실한 해안 모래사장에는 수백 구의 좀비들이 어슬렁거리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좀비들이 인간만을 잡아먹는 것은 아니다.
도시에서 인간만큼 편하게 사냥할 수 있는 사냥감이 없다보니 주로 인간을 노릴 뿐이다. 인간이 없다면 개나 고양이, 쥐가 좀비들의 식사거리였다. 철저한 채식주의자라도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육식에만 집착하게 된다.
해안도시인 후쿠이 시는 좀비 세상이 된 이후 순식간에 황폐해졌기에 온전한 인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쩌다 발견된 인간들은 순식간에 좀비들한테 뜯어 먹혀 좀비로 변화되기 전에 뼈만 남는다.
도시에서 사냥할 인간이 사라지자 좀비들은 해안가로 몰렸다. 파도에 떠밀려 오는 물고기 사체가 좀비들에게는 유용한 먹거리였다.
지금 미치구치 모래사장에서 어슬렁거리는 좀비들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물고기를 찾는 중이었다.
이때 해안의 모래사장을 파헤치던 좀비들이 일제히 고개를 쳐들었다.
투타타타–!
바다 저편에서 날아오는 물체는 로빈슨R44 소형헬기였다. 전조등을 밝히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소리만 들렸지만 헬기가 해안가로 다가서자 헬기 외관에 설치된 표시등을 통해 형상이 분명하게 보였다.
“카우우……!”
“크어어……!”
좀비들은 머리 위 300피트 위를 날아가는 헬기를 부여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부질없는 몸부림이었다.
헬기 뒷좌석에 앉아 있던 왕첸이 해변을 향해 자동소총을 겨누었다.
“캡틴, 저 아래서 꼬물거리는 것들이 좀비 맞지? 전조등 좀 밝혀 봐. 일본 원정을 온 기념으로 몇 놈 쏴줘야겠어.”
요아도 창밖으로 몸을 내밀려 권총의 노리쇠를 후퇴시켰다.
“오, 그거 재밌겠는 걸? 누가 많이 사냥하는지 내기할까?”
“좋지. 진 사람이 저녁 식사 차리기.”
“훗, 내 상대가 되겠어? 식사 차릴 준비나 해.”
한데 앙드레가 조종간을 당겨 헬기의 고도를 높였다.
“공연히 소란을 일으켜 좀비들을 자극하지 마. 놈들도 본능적인 분노를 알고 있으니까.”
적이 실망한 요아와 왕첸이 서로를 보며 떨떠름한 입맛을 다셨다.
“하여간 앙드레는 너무 고지식해서 재미가 없어.”
“그러게. 무료해서 사격 연습 좀 하려는 건데.”
이때 헬기 동체가 요란하게 진동하더니 엔진소리가 불규칙해졌다. 이어 엔진이 꺼지면서 프로펠러가 회전을 멈추었다.
푸르륵……!
앙드레가 재차 시동을 걸었지만 엔진은 작동되지 않았다.
“엔진이 완전히 나갔군. 비상착륙을 해야겠다.”
요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왕첸처럼 머리로 계기판을 받아 봐! 지난번에는 그렇게 해서 다시 작동됐잖아?”
왕첸은 필요한 보급품을 챙겨 요아에게 건넸다.
“그때는 운이 좋았던 거지 고철덩어리가 매번 통하겠어? 그나마 동해를 건너 일본까지 온 것만으로도 하느님이야!”
앙드레는 전조등을 밝혀서 주변을 살폈다.
가급적 도심은 피해야 했다. 좀비들의 주요 거점들이 시가지이기에 외곽으로 멀어질수록 안전하다. 고도계가 급격하게 내려가면서 경보장치가 왱왱 울리며 고막을 자극했다.
시가지 밖으로 야트막한 산이 보였다. 시로산이었다.
헬기는 조정불능 상태라 사선을 그리며 무지막지한 속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보급품부터 투하해!”
앙드레의 지시에 요아와 왕첸과 기내에 비치된 보급품을 창밖으로 던졌다. 얼마만큼 회수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생존을 위해서는 필요한 물품들이었다.
헬기가 지상에서 20미터쯤에 이르자 세 사람은 각기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낙하산도 없는 자유낙하였다. 산자락에 송림이 울창했지만 수림이라 하여 안전할 수는 없었다.
곧바로 헬기가 완만한 벼랑에 처박혔다.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낙하하던 앙드레가 손을 뻗어 왕첸의 어깨를 쥐었다.
“최대한 머리를 보호해!”
왕첸이 몸을 웅크리자 앙드레는 소나무 가지를 왼발로 찍었다.
우지끈–!
나뭇가지가 대번에 분질렀지만 그 바람에 추락 속도를 상당히 늦출 수 있었다.
앙드레는 연이어 나뭇가지를 왼 발로 찍으면서 수직 낙하에서 벗어났다. 바닥 가까이 이르자 앙드레가 왕첸을 놓아 주었다.
왕첸이 덤불 속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아이쿠!”
무난하게 착지한 앙드레가 허공을 올려보았다.
요아 역시 나뭇가지를 걷어차면서 하강하고 있는데 움직임이 새처럼 날렵했다. 좀비 바이러스를 치료한 이후 그녀의 체력은 나날이 발전해 어지간한 높이에서 추락해도 낙법을 펼칠 수 있었다.
공중제비를 돌아 사뿐 내려선 요아는 권총을 뽑아들고는 주변을 경계했다. 숲속이라 아주 어두웠지만 달빛이 스며들기에 조금은 시야를 분간할 수 있었다.
앙드레가 왕첸을 일으켜 세웠다.
“다친 데는 없냐?”
왕첸은 자신의 몸을 살피고는 앙드레에게 사례를 표했다.
“고마워, 캡틴.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어. 역시 캡틴이야.”
“서둘러. 좀비들이 몰려오기 전에 이곳을 떠야겠다.”
세 사람은 어깨에 견착등을 부착하고는 나무 사이를 달려갔다. 수림 속 여기저기 탄창과 소총 몇 정, 비상식량이 흩어져 있었다.
왕첸은 배낭에 최대한 보급품을 챙겨 넣고는 등에 멨다.
이때 수림 밖에서 고약한 비명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카아악!”
좀비들의 비명소리였다.
“상황을 파악해야겠군. 이동.”
앙드레가 앞서 달려가자 요아와 왕첸이 주변을 경계하면서 뒤를 따랐다.
숲 속의 공터에는 수백 구의 좀비들이 운집해 있었다. 좀비들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인 상황에서 누군가 좀비들과 싸우고 있었다.
퍽–퍽–!
일본도가 번득일 때마다 좀비들의 목이 잘리고 머리통이 쪼개졌다.
오직 일본도 한 자루에만 의존해 좀비들과 싸우고 있는 사람은 앳된 용모의 일본 여인이었다. 안색이 다소 창백하고 마른 체형이었지만 칼 솜씨가 상당했고 몸놀림이 놀랍도록 빨랐다.
퍼–퍼퍽!
달려들던 좀비들의 족족 쓰러졌지만 죽음 자체에 무관한 좀비들이기에 포위망이 더욱 좁혀졌다. 모처럼 인간의 냄새를 맡은 좀비들에게 있어 여인은 그저 매서운 사냥감일 뿐이었다.
여인은 혼자서 30구도 넘은 좀비들을 쓰러뜨렸지만 역시 혼자서 좀비들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헉… 헉……!”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오면서 그녀의 칼질이 조금은 무디어졌다. 반면 좀비들의 기세는 더욱 사나워졌다.
“카우우우!”
좀비가 내리긋는 손톱에 여인의 옷자락이 잡혔다.
찌이익!
다행히 옷자락만 찢겼을 뿐 상처는 입지 않았다. 여인은 급히 몸을 회전시켜 좀비의 목을 날려버렸다.
이때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지면서 좀비들의 포위망 일각이 무너졌다.
투투투–탕탕–!
견착등을 환하게 밝힌 앙드레 일행이 횡대를 유지하면서 좀비들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했다.
왕첸은 몰려드는 좀비들 사이로 수류탄을 던졌다.
“이거나 먹어라, 괴물들!”
수류탄이 터지면서 몸뚱이가 찢긴 좀비들이 사방으로 널브러졌다.
좀비들이 앙드레 일행을 향해 몰려간 덕분에 여인은 겨우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인은 일본도를 휘둘러 좀비 몇 구를 쓰러뜨리고는 수림 사이로 도주했다.
여인이 사라지자 왕첸이 투덜거렸다.
“뭐야? 기껏 도와줬는데 인사도 없이 그냥 가는 거야?”
수백 구의 좀비들과 계속해서 싸우는 것은 무모한 전투였기에 앙드레도 퇴각을 지시했다.
“능선 쪽으로 이동해!”
그는 시그를 어깨에 걸고는 매그넘을 뽑아들었다.
탕, 탕, 탕!
앞서 달려들던 좀비들이 고꾸라지자 앙드레 일행은 나무 사이로 달려갔다.
“카우우우!”
좀비들이 아우성을 치며 추격해왔다.
수림을 벗어나자 다소 가파른 암벽이 보였다. 앙드레와 요아는 양쪽에서 왕첸의 손을 쥐고는 바닥을 박찼다. 몇 번 점프를 하는 사이 그들은 암벽을 타고 벼랑 위에 이를 수 있었다.
벼랑 아래로 바글거리는 좀비들이 내려다보였다. 벼랑 위를 기어오르려던 좀비들은 미끄러지면서 다른 좀비들과 뒤엉켜 넘어졌다.
왕첸은 수류탄 2개를 까서 벼랑 아래로 던졌다.
“새끼들, 내가 그렇게 먹고 싶으냐?”
펑–펑–!
수류탄이 폭발하자 십여 구의 좀비들이 산산조각이 나 널브러졌다.
좀비들은 앙드레 일행이 자신들의 손에 미치지 못함을 인지했는지 어기적거리며 흩어졌다.
앙드레는 능선 너머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타고 왔던 헬기가 추락하면서 피어오른 불길이 아직 타오르고 있었다. 항공유가 잔뜩 실린 헬기였기에 당분간 산불이 지속될 것 같았다.
요아가 담배를 꼬나물면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설마 도쿄까지 걸어가자는 얘기는 아니지?”
앙드레가 스마트 워치의 액정화면을 통해 지도를 확인했다.
“일단 바이크부터 구해야겠어. 산간도로를 이용하면 좀비들과 거의 충돌하지 않고 기후현까지 이를 수 있을 거야. 연후 고속도로 사호선을 이용하면 도쿄에 당도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글쎄, 빠르면 이틀. 늦어도 사흘 정도면 도착할 거야.”
“제기, 도중에 연료가 떨어지면 열흘 넘게 걸릴지도 모르겠군.”
요아는 애꿎은 왕첸을 닦달했다.
“왕 서방, 네 실력이 이것밖에 안 돼? 정비만 제대로 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요아. 바다에서 고장났으면 우리 모두는 물고기 밥이 됐을 거야. 어쨌거나 일본 땅은 밟았잖아? 그게 중요한 거라고.”
“하여간 재주껏 바이크를 구해 봐!”
“바이크를 구하려면 시가지로 나가야 돼. 이런 산중에 바이크나 차량이 어디 있겠어?”
앙드레는 하늘의 달을 올려보았다.
“일단 식사부터 하자. 이곳에서 야영을 한 후 내일 날이 밝으면 시가지를 수색해서 탈 것을 찾아봐야지.”
세 사람은 안전한 야영지를 찾기 위해 벼랑과 이어진 숲으로 이동했다.
나무들은 높지 않았지만 나뭇가지마다 잎사귀가 울창해 숲속은 다소 어두컴컴했다.
왕첸은 견착등을 통해 나무 사이를 살폈다.
“아, 배고파라. 대충 자리를 잡고 식사부터 하자고.”
한데 나무 뒤에서 튀어나온 예리한 칼이 왕첸의 목을 위협했다. 칼날에서 뿜어지는 싸늘한 예기에 왕첸은 숨이 턱 막혔다.
“허억!”
앙드레와 요아가 나무 뒤쪽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허튼수작 마!”
요아가 나무쪽으로 우회하면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당장 나오지 못해!”
일본도를 쥔 손에 이어 창백한 안색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전에 좀비들과 싸우던 그 여인이었다.
앙드레는 여인을 향해 겨누었던 매그너 권총을 내렸다.
“안심해. 당신을 해치러 온 게 아니야. 그 칼부터 내리지?”
앙드레가 손짓을 보내자 요아도 권총을 허리춤에 꽂았다.
“이봐, 그 친구는 비감염자야. 크게 쓸모는 없어도 죽일 필요까지는 없어.”
여인은 여전히 경계의 눈빛으로 앙드레와 요아를 주시하다가 일본도를 칼집에 꽂았다.
“한국인?”
여인이 한국말로 묻자 요아가 호의적인 미소를 띠며 한 걸음 다가섰다.
“맞아. 난 토종 한국인이야. 이름은 요아라고 하지. 이 친구는 앙드레 김이라고 하는데 반만 한국인이야. 거기 왕 서방은 중국인인데 왕첸이라 하지. 내 말 알아듣는 거야?”
여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요아가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야?”
“하메시.”
“아, 하메시? 만나서 반가워.”
“…….”
“어디서 살아? 우리가 먹을 게 조금 있으니 함께 저녁이나 먹을까?”
왕첸이 등에 멘 배낭을 툭툭 쳤다.
“사무라이 아가씨, 우리 나쁜 사람 아니니 친하게 지내자 해. 약속할 수 있다 해.”
세 사람을 쓸어본 하메시는 어느 정도 믿음이 생겼는지 몸을 돌렸다.
“따라 와.”
앙드레 일행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하메시를 따라갔다.
요아가 앙드레에게 나직이 물었다.
“괜찮겠지?”
“그냥 도주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우리를 해치려는 의도는 없는 것 같아.”
“하긴 해칠 의도가 없었다면 왕첸의 목부터 땄을 거야.”
왕첸은 어깨를 움츠리며 자신의 목을 감쌌다.
“그런 소리 마. 아직도 목덜미가 서늘해.”
하메시의 거처는 벼랑 중간의 동굴이었다. 좀비들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니 거처로는 안성맞춤이었다.
하메시는 벼랑 곳곳에 박아놓은 쇠못을 밟고는 산양처럼 날렵하게 동굴로 올라갔다.
요아가 싱긋 미소를 띠었다.
“호오, 칼만 잘 쓰는 줄 알았는데 몸놀림도 제법이네? 나와 겨룰 정도는 되겠어.”
그녀가 정을 밟고 올라가자 앙드레는 왕첸의 뒷덜미를 쥐었다.
“우리도 올라가지.”
왕첸은 번번이 신세를 지게 되자 자존심이 상했다.
“캡틴, 나 혼자 올라갈 수 있어.”
“알아. 하지만 주인을 너무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군.”
앙드레는 두 번의 도약만으로 동굴에 이를 수 있었다.
동굴 안은 의외로 넓고 쾌적했다.
한쪽으로 싱글 매트리스가 깔려 있어 침대를 대신했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이 제법 갖춰져 있었다. 천장에는 건전지로 작동되는 랜턴이 걸려 있어 동굴 안을 은은하게 밝혀 주었다.
왕첸과 하메시가 부뚜막에서 물을 끓여 비상식량으로 저녁을 만드는 동안 앙드레와 요아는 동굴 안을 두루 살폈다.
작은 촛불이 밝혀진 낮은 책상 위로 여러 개의 사진 액자가 놓여 있었다.
빛바랜 사진에는 하메시의 가족으로 추정되는 여러 사람의 해맑은 모습이 보였다. 어린 하메시를 안고 있는 조부모와 부모, 자매들의 모습에서 과거의 행복한 시절을 엿볼 수 있었다.
요아가 사진 속의 어린 하메시를 가리켰다.
“이게 하메시의 어린 모습인가 봐. 크게 변하지 않았어.”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남았나 보군.”
“왜 사람들과 섞여 살지 않을까? 이런 산중에서 혼자 사는 게 외롭고 두려울 텐데.”
“어쩌면 현명한 삶일 수 있어. 좀비들은 후각이 예민하지. 사람들이 사는 곳은 어떻게든 찾아내는데 이런 외진 곳까지는 찾아오지 못할 테니까.”
요아는 잠시 전 좀비들과 싸우는 하메시를 떠올렸다.
“하면 그 좀비 새끼들은 어떻게 산중까지 찾아온 거지?”
“우리가 탄 헬기가 추락하면서 폭발했잖아? 그 정도 굉음이면 십 킬로미터 밖의 좀비들도 들었을 거야.”
“하아, 이제 이해가 돼. 하메시도 폭발이 궁금해 나섰다가 좀비들과 맞닥뜨린 거였을 거야.”
앙드레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메시가 우리 때문에 죽을 뻔했으니 구해준 게 당연했어. 어쨌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야.”
한쪽으로 수십 권의 책이 쌓여 있었다. 만화책을 비롯해 한국어 교재도 더러 섞여 있었다.
요아가 한국어 교재를 뒤적거렸다.
“한류의 힘인가? 후쿠이현이면 일본에서도 지방일 텐데 이곳까지 한류 열풍이 불었나 봐.”
“지방이기는 해도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국과 접해 있으니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이때 왕첸이 바닥에 자리를 깔고 준비된 식사를 차렸다.
“자, 만찬이 준비됐어.”
하메시는 촛불이 밝혀진 사진액자를 향해 잠시 추도를 올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비록 맛없는 비상식량이지만 한 끼 식사를 대신하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통조림 캔이 곁들여져 있기에 하메시로서는 모처럼 만의 성찬이었다.
요아가 통조림 캔의 황도를 오물거리며 물었다.
“하메시, 일본 좀비들은 어때? 여기 좀비들도 집단으로 행동하고 위장전술도 펼쳐?”
하메시의 의아한 표정을 짓자 요아가 설명해 주었다.
“서울의 좀비들이 점점 흉악해져서 하는 소리야. 지능까지 갖춘 데다 함정까지 파고 기다릴 줄 알거든. 일본 좀비들도 그렇다면 도쿄까지 가기가 힘들 것 같아.”
“도쿄……? 도쿄에 간다고?”
처음으로 두 마디 이상을 말했지만 한국어 억양은 비교적 정확한 편이었다.
“그래, 우리가 뭐 해외여행 삼아 일본까지 온 게 아니야. 도쿄에 있는 애니그마 일본 연구소로 도주한 윤서경 사장란 놈을 추격하기 위해 동해를 건너온 거지.”
“애니그마가 뭐지?”
“설명하기가 좀 긴데… 하여간 좀비 바이러스를 만들어 낸 나쁜 놈들이야. 세상이 좀비 세상으로 바뀐 것도 놈들 때문이라 할 수 있지.”
일순 하메시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그 사람들이 좀비 바이러스를 만들었다고? 저절로 생긴 게 아니고?”
앙드레가 간략하게 얘기해 주었다.
“애니그마 연구소는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이야. 놈들의 정확한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초인류를 만들기 위해 좀비 바이러스를 생산했다가 그게 세상으로 퍼진 거지. 좀비 바이러스는 워낙 감염성이 강한 데다 치료제가 아직 개발되지 않아 계속 확산되고 있어. 인류가 단결해서 대항하지 않으면 인류는 종말을 맞게 될 지도 몰라. 어쩌면 애니그마 연구소는 이미 치료제를 개발했는데도 그것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지.”
“왜?”
“그래야 치료제를 무기 삼아 자신들이 지구를 지배할 수 있으니까. 물론 상세한 내막은 나도 잘 몰라.”
“…….”
하메시는 촛불을 밝힌 사진 액자 앞에 무릎을 꿇고는 손을 모았다. 그녀의 숙연한 모습에 앙드레 일행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
요아가 하메시 옆으로 다가앉으며 물었다.
“여기 사진 속의 사람들이 하메시의 가족이야?”
“그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엄마, 누나…….”
“모두 좀비들한테…….”
하메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요아가 벽에 기대앉으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하메시뿐만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가족을 잃었어. 너무 많은 사람들을 잃었기에 이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아.”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자 왕첸이 너스레를 떨었다.
“사무라이 아가씨, 이곳에서 혼자 지내지 말고 우리와 함께 도쿄로 가는 게 어때? 도쿄의 애니그마 연구소 놈들을 제거하면 조금은 복수를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느닷없는 제안에 하메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하, 솔직히 말하면 길을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하메시가 적격인 거 같아.”
하메시는 왕첸과 앙드레, 요아에게로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눈빛에서 그다지 반감은 없어 보였다.
하메시가 관심을 보이자 요아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그래, 하메시. 꼭 가이드가 필요해서가 아니야. 좀비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당당히 맞서야 돼. 우리의 목표는 단지 도쿄가 아니야. 도쿄 일을 마무리 지으면 런던까지 건너갈 생각이야.”
“런던…….?”
“그래, 애니그마 본사가 있는 곳이지. 앙드레의 딸이 이송된 곳이기도 하고. 대체 어떤 새끼들이 좀비 바이러스 같이 위험하고 지저분한 세균을 생산했는지 그 낯짝을 꼭 보고 싶어.”
하메시는 은은한 분노 어린 눈빛으로 앙드레를 직시했다.
“좀비 바이러스가 정말… 만들어진 거야? 신이 보낸 형벌이 아니고?”
“세상에 신이 존재하고 만일 신이 형벌을 내리기 위해 좀비 바이러스를 살포했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라 악마야. 좀비 바이러스는 애니그마 연구소에서 개발된 게 확실하니 놈들이 바로 악마이지.”
“그럼 놈들이 내 가족을 해친 거네?”
“하메시의 가족뿐만 아니라 인류 대부분을 해쳤어.”
하메시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눈에 결연한 눈빛이 담겨 있었다.
“좋아, 나도 함께 가겠어. 내 가족을 해친 악마를 제발 죽이게 해 줘.”
하메시의 동행.
앙드레 일행은 뜻하지 않게 일본에서 새로운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
Written by : Mich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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