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ré’s Choice: In a Broken World”
“Wangsimni Station”
왕십리역.
1
메트로2호선에 속한 왕십리역은 메트로5호선에 이어 분당선과 중앙선까지 교차되는 환승역이 되었다. 엘리시움은 환승역사마다 서브시티를 건설했는데 왕십리역은 성동구에서 가장 큰 서브시티로 발전되었다.
하대수 일행은 왕십리 광장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바이크를 멈춰 세운 채 왕십리역 일대를 쌍원경으로 살피고 있었다.
역사 주변은 수많은 좀비들로 가득했다.
일천 구도 넘는 엄청난 숫자의 좀비들이 왕십리역 일대를 배회하고 있었다. 일부 좀비들은 역사의 벽을 두드리며 괴성을 발하기도 했다.
하대수는 쌍원경을 내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좀비들이 너무 많군. 역사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겠어. 대체 좀비 새끼들이 왜 역사 주변에 바글대는 거지?”
김석현이 건조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엘리시움 측에서 의도적으로 좀비들을 끌어들인 것 같소.”
“의도적이라고? 왜?”
“윤서경 입장에서는 사령관과 만나봤자 득 될 게 없으니 좀비들을 이용해 사령관을 역내로 진입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소. 결국 우리가 되돌아가면 좀비들이 두려워 찾아오지 못했다고 마음껏 조롱할 수 있지 않겠소?”
“개새끼, 별 치사한 수작을 다 부리는군.”
하대수는 강철민에게 지시를 내렸다.
“정면 돌파하겠다. 윤서경 새끼한테 치욕을 당하느니 좀비들과 싸우다 죽겠다.”
“알겠소, 사령관.”
강철민 K1A자동소총의 총구를 핸들에 묶었다. 바이크를 타고 돌격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자 앙드레가 하대수 옆으로 다가섰다.
“사령관, 내가 좀비들을 유인할 테니 전사들과 함께 역내로 진입하시오.”
“좀비들을 유인하겠다고?”
“그렇소.”
“그건 너무 위험해. 정면 돌파를 시도하겠네.”
“그랬다가는 역내로 진입하기도 전에 좀비들에게 포위될 거요. 요행히 포위망을 돌파해도 상당한 손실을 피할 수 없소.”
이에 강철민가 괄괄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앙드레, 자네 혼자 영웅 될 생각인가? 좀비들을 유인하겠다면 나도 함께 나서겠네.”
“둘이 움직이면 나중에 탈출이 어렵소. 나 혼자 나서겠소.”
앙드레의 결연한 모습에 하대수가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좋아, 앙드레가 유인전술을 전개하면 모두들 최대 속도로 좀비들을 돌파해 역내로 진입한다.”
요아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앙드레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겠어?”
“내가 오래 버티기는 힘드니 최대한 서둘러.”
“나도 돕고 싶은데…….”
“걱정 마.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앙드레가 바이크에 올라앉자 유빈이 애써 미소를 띠었다.
“기다릴게요, 아저씨.”
앙드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왕십리 광장으로 달려갔다.
부다다당!
요란한 바이크 소리에 역사 외곽에서 어슬렁대고 있던 좀비들이 반응을 보였다. 앙드레는 좀비들을 향해 시그556을 발포했다.
투투투!
좀비들 몇 구가 머리가 터지며 나자빠졌다. 그러자 역사를 에워싸고 있던 좀비들이 돌아섰다.
“카우우!”
굶주려 있던 좀비들은 괴성을 지르며 앙드레를 향해 몰려들었다.
일천 구도 넘는 좀비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광경은 실로 끔찍했다. 마치 한 마리 가젤을 사냥하기 위해 몰려드는 하이에나 떼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노린 사냥감은 연약한 가젤이 아니라 강맹한 수사자였다.
앙드레는 대대급 좀비들을 이끌며 왕십리 광장을 선회했다.
앙드레의 유인 전술 덕분에 왕십리역사 주변에는 거동이 느린 좀비들만 일부 남게 되었다.
“진격!”
하대수이 외치자 8대의 바이크가 동시에 역사를 향해 질주했다.
투투투, 탕탕–!
요란한 총성이 난무하면서 좀비들이 연이어 고꾸라졌다.
강철민과 전사들이 역사 입구를 점거하자 하대수가 출입구 상단의 외부 카메라를 향해 외쳤다.
“어서 문 열어, 새끼야!”
외부 마이크를 통해 음성이 들려왔다.
“안전을 위해 한번만 열 수 있소. 이는 사장님의 지시요.”
“썅, 잠시 기다려!”
하대수는 무선 통신기를 귀에 꼈다.
“앙드레, 출입구에 도착했네. 어서 합류하게!”
“알겠소.”
앙드레가 응답하자 하대수는 전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앙드레가 합류할 때까지 최대한 버틴다!”
전사들은 바이크를 교차해 쓰러뜨려 바리게이트로 삼았다.
투투투–!
요아는 달려드는 좀비들을 향해 자동소총을 쏘아대며 안타깝게 외쳤다.
“앙드레! 서둘러– 어서!”
2
부다다당!
앙드레는 좀비들 사이로 능숙하게 바이크를 몰았지만 워낙 다수가 몰려들자 핸들을 조작하기도 쉽지 않았다. 자신을 에워싼 포위망의 폭이 족히 수십 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무선 통신기를 통해 하대수의 음성이 들려오자 앙드레는 급히 핸들을 틀었다.
“카우우!”
좀비들이 새까맣게 달려들자 앙드레는 바이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탕, 탕, 탕!
앙드레는 좀비들의 면상에 매그넘을 작렬시키고는 정글도를 휘둘러 좀비들의 목을 벴다. 순식간에 20구의 좀비들을 쓰러뜨렸지만 대대급 좀비들이다 보니 전혀 타격이 되지 못했다.
앙드레는 좀비들을 헤치며 전진하다가 요아의 외침을 듣게 되었다.
“앙드레, 어서!”
거리가 멀어 아련했지만 앙드레에게는 정신력을 북돋아주는 주문이었다.
‘간다, 요아!’
앙드레는 왼발로 힘껏 바닥을 박찼다.
그는 5미터 높이로 점프하면서 몰려든 좀비들의 공격을 피했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온통 좀비 천지라 발 디딜 곳도 마땅치 않았다.
단숨에 7미터를 건너 뛴 앙드레는 좀비 한 구의 대가리를 밟고는 재차 도약했다.
퍽, 퍽, 퍽!
앙드레가 좀비들의 대가리를 징검다리처럼 밟고 달려오자 헬돔의 전사들은 경이로운 탄성을 토했다.
“으와, 슈퍼맨이 따로 없군.”
“대단해! 과연 좀비 슬레이어야!”
“우사인 볼트라도 저렇게 달리지는 못할 거야!”
하대수이 엘리시움의 외부 카메라를 향해 외쳤다.
“당장 문을 열어!”
기이이잉……!
문이 열리자 김석현과 강철민이 전사들을 이끌고 신속하게 진입했다.
요아가 좀비들을 향해 총을 쏘아대며 외쳤다.
“사령관! 아직 앙드레가 오지 않았어!”
“알아. 앙드레가 합류하지 않으면 나도 피하지 않겠다.”
곧이어 앙드레가 출입구 앞으로 내려서자 하대수은 아나콘다 권총을 연이어 발사했다.
“어서 진입해!”
요아와 앙드레가 역내로 들어가자 하대수는 탄창이 빌 때까지 권총을 쏘고는 돌아섰다.
“새끼들, 나머지 놈들은 다음에 죽여주겠다.”
그가 역내로 들어서자 강화유리문이 신속하게 닫혔다.
“카우우우!”
뒤미처 달려든 좀비들이 매끄러운 강화유리문을 할퀴고 두드렸지만 부질없는 몸부림이었다.
3
앙드레와 하대수 일행을 맞이하는 엘리시움의 보안대원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대대급 좀비들을 간단하게 뚫고 역내로 들어선 하대수 일행의 전투력에 기가 질렸는데 두려운 표정이 역력했다.
왕십리역장 최현이 하대수 일행을 메트로2호선 승강장으로 안내했다.
서브시티 거주민들을 미리 대피시켰는지 승강장에는 탑승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선로에는 달랑 한 냥짜리 객차만 대기해 있었다. 하대수 일행만을 태울 전용열차였다.
객차 문이 열리자 최현 역장이 탑승을 권했다.
“타시오. 서울역까지 곧장 운행될 거요.”
“경고하는데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안심하시오. 사장님께서는 사령관 일행에게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라고 지시하셨소.”
“믿어 보겠다.”
하대수 일행과 앙드레가 탑승하자 문이 닫혔고 곧바로 운행이 시작되었다.
덜컹덜컹……!
객차는 중앙통제실에서 조종되기에 기관사가 필요 없었다. 객차 전면의 유리창을 통해 끝없이 이어진 터널이 보였다.
유빈은 요아와 함께 전면 유리창 앞에 서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얘기를 주고받았다. 다른 전사들은 의자에 편히 기대앉아 담배를 피우며 무기를 점검했다.
강철민이 다가와 앙드레에게 시가를 건넸다.
“과연 좀비 슬레이어로군. 나도 전투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자부했는데 자네를 보니 나보다 한 수 위인 것 같네. 좀비 사냥대회라도 열리면 한번 겨뤄보자고.”
“세상에 널린 게 좀비요. 귀환할 때는 당신이 실력을 발휘해 보시오.”
“훗, 나도 그럴 생각이네.”
강철민는 앙드레가 물고 있는 시가에 불을 붙여주고는 하대수 쪽으로 물러갔다.
잠시 후 요아와 유빈이 앙드레의 좌우로 앉았다.
“다시는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알았어?”
“달리 방법이 없었잖아?”
“그렇다고 왜 앙드레가 나서? 싸우고 싶어 환장하는 강철민도 있는데?”
“어쨌든 아무 일 없었으니 된 거야.”
유빈이 존경의 눈빛으로 앙드레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정말 대단하세요. 저도 아저씨처럼 용감한 전사가 되겠습니다.”
“나 같은 전사가 되지 마라.”
“예에……?”
“나 보다 열 배는 더 뛰어난 전사가 돼.”
“아, 알겠습니다.”
유빈이 환한 표정을 띠자 요아가 고개를 저었다.
“유빈, 제발 부탁이니 전투를 너무 즐길 생각 마. 넌 경험이 더 필요해.”
“나도 알아. 그래서 지금 경험을 쌓고 있잖아? 이제는 좀비가 두렵지 않아. 정말이야.”
유빈은 자신 있게 말하고는 전사들 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네 명의 전사들과 섞여 전투에 대해 얘기를 주고받았다.
요아는 잠시 유빈을 지켜보다가 앙드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메트로레인을 타보기가 정말 오랜만이야. 이곳에 있으니 왠지 예전의 세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
“예전의 세상…….”
앙드레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좀비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지나와 제니가 함께 있는 곳으로……!’
덜컹덜컹……!
전용객차는 동대문운동장역에서 환승선로를 타고 메트로4호선으로 진입했다. 도중에 서브시티가 형성된 충무로역을 지나쳤지만 스크린도어로 막혀 있어 서브시티 거주민들과의 대면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용객차는 오래지 않아 서울역에 당도했다.
객차 문과 스크린 도어가 열리면서 앙드레와 하대수 일행이 승강장으로 내려섰다.
승강장에는 20명에 달하는 엘리시움 보안요원들이 무장을 한 채 대기해 있었다.
“개새끼들, 한번 해보자는 건가?”
강철민이 어깨에 멘 자동소총을 내리려 하자 하대수가 손을 내저었다.
“기다려.”
특전사 제복 차림의 보안요원이 혼자서 다가섰다. 눈매가 예리했고 짧게 깎은 머리가 전형적인 군인 타입이었다.
“난 엘리시움의 보안국장 백인호요. 엘리시움 방문을 환영하오.”
하대수가 김석현만을 대동해 백인호와 마주섰다.
“난 헬돔의 사령관 하대수일세. 이쪽은…….”
“알고 있소. 헬돔의 훈련교관 김석현.”
백인호와는 면식이 있는지 김석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군, 백인호.”
“김석현, 자네 같이 유능한 교관이 헬돔에 머물러 있다니 솔직히 실망이네.”
“내가 할 소리야. 자네처럼 충직한 군인이 윤서경의 밑을 닦고 있다니 정말 의외이지.”
“말 삼가게. 엘리시움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서울시민은 이미 죄다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거네. 엘리시움이야말로 대한민국을 재건한 유일한 희망이자.”
“설마 윤서경을 신세계의 대통령으로 추대할 생각은 아니겠지?”
“못할 것도 없지.”
대화가 날카롭게 맞서자 하대수가 제지했다.
“그만들 두지. 감정이 있다면 혓바닥보다 총으로 해결하는 게 빠르지 않겠어? 백 국장은 어서 안내나 하게.”
“따르시오.”
백인호가 앞서 계단을 올라가자 앙드레와 하대수 일행이 뒤를 따랐다. 보안요원들은 그들 좌우에서 행보를 맞추었다.
에스컬레이터는 작동이 멈춰 있었고 실내의 전등도 흐릿했다. 전력 소모를 최대한 줄이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가파른 계단을 밟고 서울역 대합실에 이르렀다.
서울역사는 중앙역이기에 메트로레인 뿐 아니라 철도의 출발지라 대합실 규모가 엄청나다. 당연히 다수의 시민들이 거주할 것이지만 지금은 임시 차단막에 가려져 있어 대합실 내부를 볼 수가 없었다.
앙드레는 지난번 헬돔 전사들과 함께 메트로17구역으로 진입할 때도, 서브시티 시민들에게 그들을 보이지 않기 위해 차단막이 쳐져 있었음을 떠올렸다.
유빈이 요아에게 나직이 물었다.
“누나, 서브시티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었는데 전부 가려 버렸네. 왜 이런 거야?”
“엘리시움 놈들이 우리 헬돔 전사들을 악당처럼 선전했기에 일부러 보이지 않으려는 거야.”
“우리가 악당은 아니잖아?”
“당연하지. 진짜 지옥은 헬돔이 아니라 이곳 엘리시움이야. 서브시티 거주민들이 그것을 알게 되면 지금 체제가 무너질 수 있기에 우리와의 접촉을 막으려 하는 거지.”
요아는 로비에 설치돼 있는 분수대를 보고는 욕설을 퍼부었다. 조명까지 갖춰진 분수대에서는 시원스런 분수가 뿜어지고 있었다.
“니미, 이런 판국에 별 지랄을 다하는군. 이곳은 에너지가 남아도나 봐.”
김석현이 건조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본래 쥐구멍일수록 애써 꾸미려 하지.”
그들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통해 사장실로 향했다.
4
“사장님, 저들이 죽지 않았습니다!”
메트로17구역의 한상만 역장이 멀티비전에 비친 영상을 보고는 입을 딱 벌렸다.
윤서경은 담배파이프를 손질하고 있다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누구를 말하는 건가?”
“지난번 메트로레인 13호선을 개통시키겠다며 애니그마 연구소에 진입했던 자들 말입니다.”
“무슨 소리야? 테네시의 보고에 의하면 연구소 내로 진입한 자들은 모두 죽었다고 했어.”
“절대 아닙니다. 저자가 블랙레벨의 앙드레고, 옆의 여전사가 헬돔의 순찰대장인 요아입니다. 제가 직접 만났기에 분명히 기억합니다.”
“…….!”
윤서경은 파이프에 잎담배를 채우며 눈을 가늘게 떴다.
‘테네시! 기계 주제에 감히 거짓 보고를 올려?’
그는 자신 뒤에 서 있는 한상만에게 나직이 주의를 주었다.
“자네는 계약 건 외에는 입도 벙긋하지 마. 알겠나?”
“예, 사장님.”
윤서경은 담배파이프를 물고는 좌측에 앉아있는 사람을 힐끗 보았다.
좌측에 앉아 있는 거구의 장년인은 부적처럼 보이는 쇠목걸이를 잔뜩 걸고 있었다. 드러난 팔뚝과 목까지 요란한 문신이 가득해 거친 위화감을 조성했다.
거구의 사내는 윤서경 사장의 경호를 책임지는 경호국장 황해였다. 엘리시움 창설 때부터 윤서경 사장를 수행해 온 측근으로 충성심이 대단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하대수 일행이 들어섰다. 유빈을 비롯한 수행전사들은 복도에서 대기해 있었다.
“어서 오시오, 하대수 사령관!”
윤서경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맞이하자 황해도 따라 일어섰다. 백인호은 탁자를 지나쳐 윤서경 사장의 우측으로 섰고 하대수 일행은 탁자 맞은편에 멈춰 섰다.
탁자의 길이가 10미터나 되었다. 행여 있을 기습에 대비해 충분한 거리를 둔 것이다.
“오랜만이오, 윤서경 사장.”
하대수가 자리에 앉자 김석현이 옆에 앉았다.
준비된 의자가 세 개뿐이기에 강철민이 앙드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앉게.”
“아니, 됐소.”
“자네가 이번 협상의 중요한 증인이기 때문에 예우하는 거니까 앉아.”
요아가 데니시의 어깨를 쥐고 의자에 앉혔다.
“맞아, 앙드레는 앉을 자격이 있어.”
양측 사람들이 좌정하자 윤서경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짝!
문이 열리면서 바니걸 차림의 여비서들이 들어섰다. 여비서들은 탁자 위에 시가와 맥주, 와인, 과일, 과자 등을 풍성하게 차려놓고 물러갔다.
바니걸들을 쏘아보는 요아의 눈빛이 고까웠다.
‘니미, 지금 세상에도 저런 년들이 다 있네?’
윤서경이 크리스탈 잔에 와인을 따랐다.
“취향대로 고르시오, 하대수 사령관. 그동안 영상 통화로만 보았는데 이렇게 대면해 정말 반갑소.”
하대수은 건배 대신 시가를 입에 물었다.
“윤사장, 당신과는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소. 서로 주고받을 것만 챙기면 곧바로 떠나겠소.”
“급할 게 뭐 있겠소. 엘리시움은 풍요로운 곳이니 수행전사들에게도 풍성한 식사를 제공할 수 있소.”
강철민이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큿, 서브시티 거주민들은 구더기나 파먹는다고 들었는데 이곳에서는 음식이 남아도나 보군.”
그러자 황해가 탁자를 치며 눈을 부릅떴다.
“말조심해라, 강철민, 난사장님만큼 자비롭지 못해!”
“네 얘기는 익히 들었다, 황해. 덩치와 달리 계집애처럼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고 하더군. 특히 좀비 새끼들 앞에서는 말이야.”
“이런, 썅!”
벌떡 일어선 황해가 권총을 뽑으려 하자 백인호가 차갑게 외쳤다.
“앉게, 경호국장! 사장님과 헬돔의 사령관이 말씀 중이니 누구도 함부로 끼어들지 마!”
황해의 경거망동을 제지하면서 동시에 강철민의 도발을 질책하는 경고였다.
황해가 자리에 앉자 윤서경은 담배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사령관. 요구하는 것을 말해 보시오.”
“난 엘리시움과의 계약대로 메트로레인의 통행권을 보장받아야겠소.”
“흐음, 계약이라… 난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앙드레, 엘리시움 인간들은 기억력이 좋지 못한 것 같으니 다시 들려주게.”
하대수가 턱짓을 해 보이자 앙드레가 스마트 워치에 대고 말했다.
“한상만 역장과의 녹음 파일 재생!”
곧바로 스마트 워치에서 김한수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알겠소. 헬돔의 메트로레인 통행권을 보장하겠소. 하지만 몇 가지 제한을 두어야 하니 세부조건은 차후에 논의하기로 합시다. 어차피 임무를 성공해야 다음 회의에서도 만날 수 있으니까.
5
앙드레는 윤서경 뒤에 서 있는 한상만을 직시했다.
“한상만 역장, 당신은 나와의 계약 때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했소. 만일 그 말을 부인하면 나와 헬돔을 속인 거니 이 자리에서 당신을 죽이겠소.”
어조는 차분했지만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한상만의 이마에 절로 땀방울이 맺혔다.
“계약은 반드시 이행될 거요. 사장님께서…….”
윤서경이 가볍게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물론이네, 한상만 역장. 자네는 이만 나가 봐.”
“예, 사장님.”
김한수가 집무실을 나가자 윤서경이 담담한 웃음을 띠었다.
“하하, 난 무슨 소린가 했소. 김한수 역장이 내게 보고하지 않은 또 다른 이면 계약이 있었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로군.”
윤서경이 유리탁자의 투명 자판을 두드리자 탁자 윗면이 통째로 LED 화면으로 바뀌었다. 화면을 통해 메트로레인의 노선도와 환승역, 폐쇄구간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보다시피 메트로 13호선이 복구되기는 했지만 애니그마 역은 여전히 폐쇄된 상태요. 사실 내가 통행권 보장을 허락한 데에는 13호선이 복귀되면 애니그마 연구소의 시스템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소. 한데 우리는 여전히 애니그마의 연구소에 접근할 수가 없소. 과연 이것을 임무 완수로 봐야할지…….”
윤서경이 말끝을 흐리며 앙드레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좀비 슬레이어 앙드레로군. 어디 얘기를 들어봅시다. 당신과 요아가 연결통로를 거쳐 애니그마 연구실로 들어갔다는 것까지는 확인되었소. 한데 이후 교신이 두절되면서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어떻게 애니그마에서 빠져나왔는지 모르겠군. 애니그마 주변은 여전히 군단급 좀비들이 에워싸고 있는데 말이오.”
“나와 요아는 연구소에서 외부로 연결된 부속동 통로를 이용해 탈출할 수 있었소. 부속동 주변에는 다행히 좀비들이 어슬렁대지 않았소. 부하들을 보내 확인해보면 알 거요.”
“그렇다면 당신도 애니그마 연구소의 지하통제실에는 접근하지 못했다는 건가?”
“그럼 셈이오.”
“자, 그럼 얘기를 정리해 봅시다. 사실 메트로레인 13호선의 가치는 애니그마 연구소의 시스템을 우리 임의대로 사용하는데 있소. 하지만 연구실로 들어갈 수 있는 연결 통로가 여전히 폐쇄된 상태라 접근이 불가하오. 결국 앙드레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소. 이런 상황에서 메트로레인 의 통행권 요구는 지나친 욕심이오.”
윤서경이 교묘한 화술로 임무 실패를 강조하자 요아가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윤사장! 애니그마 연구소의 시스템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당신들의 무능 때문인데 왜 우리의 임무를 문제 삼아? 나와 앙드레는 분명히 메트로레인 십삼호 선의 모든 구간에서 좀비들을 몰아냈어. 엘리시움의 수많은 얼간이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완수했다고! 그 작전에 투입된 내 동료들이 모두 죽었어. 그들의 목숨을 어떻게 보상할 거야?”
요아의 거친 언사에 백인호가 차갑게 내뱉었다.
“내가 분명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그래서 어쩔 건데?”
요아가 강하게 반발하자 백인호는 아무런 대꾸 없이 품속으로 손을 가져갔다.
순간 앙드레를 비롯한 하대수 측 모두가 총을 꺼내 겨누었다.
철걱철걱!
안전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사신의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윤서경 측에서는 황해와 강철민이 쌍권총을 뽑아들고 대응했다.
일촉즉발!
누구라도 먼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양측은 몰살을 면키 어렵다.
이에 윤서경이 양손을 가볍게 쳐들었다.
“앉게, 보안국장. 황해, 자네도.”
그는 하대수에게도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냈다.
“앉으시오, 사령관. 좀비들과 맞서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우리끼리 싸워야하겠소?”
하대수은 아나콘다 리벌버 권총을 거두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다들 앉아. 그리고 내가 분명히 경고하는데 또다시 허튼수작 부리면 누구든 대가리를 날려버리겠다!”
겨우 사태가 진정됐지만 서로의 감정이 곤두선 상태라 분위기가 상당히 껄끄러웠다.
윤서경이 느긋하게 기대앉으며 담배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사령관, 헬돔에서 집요하게 통행권을 요구하는 저의가 대체 뭐요? 서브시티를 하나씩 장악해 엘리시움을 와해시키겠다는 건가?”
“그것이 우려된다면 내가 확실하게 약속하지. 난 엘리시움에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소. 내 바람은 좀비들과 맞설 싸울 전사들을 양성하는 거요.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헬돔만으로는 너무 협소해. 나는 메트로레인을 이용해 접근할 수 있는 상암구장과 잠실구장, 목동구장을 연결해 헬돔시티를 구축하려 하오.”
“흐음, 구상은 원대하군. 하지만 그 많은 헬돔시티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에너지와 병기가 필요할 텐데 그것은 어떻게 조달하려는 거요?”
“그것은 당신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오. 당신은 계약대로 메트로레인 통행권만 승인해 주면 되오.”
윤서경은 숙고에 잠기며 담배파이프를 뻑뻑 빨았다.
쉽지 않은 결정임을 알기에 하대수도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하대수의 엄중한 경고가 있어서인지 황해와 백인호도 입을 다문 채 윤서경 사장의 결정을 기다렸다.
잠시 후 윤서경이 단숨에 와인잔을 비웠다.
“좋소. 통행권을 보장하겠소. 대신 서브시티 시민들과의 접촉은 허락할 수 없으니 헬돔시티만을 운행할 수 있는 별도 차량을 제공하겠소. 헬돔에서는 메트로레인 이용에 따른 비용만 부담하면 되오. 이것이 내 최종안이며 더 이상의 협상은 없소.”
여느 때보다 눈빛이 강렬했고 표정이 단호했다.
하대수가 김석현을 돌아보며 조언을 구했다.
“어떤가, 카론 교관?”
김석현이 턱을 어루만지다가 나직이 말했다.
“나쁘지 않은 제안입니다. 받아들이시지요.”
앙드레 역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메트로레인을 독자적으로 운행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운행시스템을 전혀 갖추지 못한 헬돔이기에 당장은 엘리시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괜찮은 것 같소.”
앙드레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대수도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소, 윤사장. 그럼 별도 차량이 준비되는 대로 통보해 주시오.”
“알겠소.”
하대수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다시 앉았다.
“아, 한 가지 확인할 사안이 있소. 당신의 솔직한 답변을 기대하겠소.”
“말해 보시오.”
하대수은 윤서경의 눈을 강렬하게 직시했다.
“엘리시움이 애니그마 연구소와 어떤 관계요?”
“흐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윤사장, 당신은 애니그마 연구소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는 것 같소. 또한 애니그마 연구소에 출입할 수 있는 연결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메트로 통행권을 내줄 만큼 집착하는데 그 이유가 뭐요?”
윤서경은 자연스럽게 하대수의 시선을 피하면서 와인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애니그마 연구소의 시스템이 우리 엘리시움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설비이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뿐이오.”
“단지 그뿐일까?”
“훗,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윤사장, 난 진실을 알아야겠어.”
하대수은 의자에 기대앉으며 앙드레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앙드레, 자네가 보고 들은 것을 얘기해 주게.”
모두의 눈길이 앙드레에게 쏠렸다.
앙드레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나와 요아는 애니그마 연구소 내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이한 괴물들을 만나게 되었소. 오래전 애니그마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보았던 여직원이 메두사처럼 변한 모습도 보았소. 또한 저들이 남긴 자료를 통해 좀비 바이러스가 애니그마 연구소에서 개발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소.”
일순 윤서경의 눈가 근육이 씰룩거렸지만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백니호가 윤서경을 대신해서 반문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가? 좀비 바이러스가 애니그마 연구소에서 개발됐다고?”
“사실이오. 상세한 내막은 아마 윤사장이 알고 있을 거요. 이곳 엘리시움이 창설된 배경에도 애니그마 연구소의 지원이 있었을 테니까.”
백인호가 윤서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장님, 저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나 역시 마찬가지 심정일세, 백 국장. 난 좀비들에게 시달리는 서울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서브시티를 건설했고, 다수의 서브시티를 메트로레인으로 연결해 지금의 엘리시움을 창설한 거네. 그것은 자네도 오랜 세월 지켜보지 않았는가?”
“그 말씀은 믿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은 지속적으로 애니그마 연구소를 수중에 넣으려 했는데, 그곳의 시스템을 활용하려는 것 이외의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겁니까?”
“백 국장, 정말 실망이군. 고작 헬돔 측의 몇 마디를 듣고 나를 의심하는 건가?”
이에 요아가 차가운 미소를 띠며 반박했다.
“틀렸어. 앙드레는 헬돔과는 무관한 사람이야. 애니그마 연구소의 악독한 계략 때문에 아내를 잃고 딸까지 빼앗긴 가엾은 사람이지. 내가 말하면 믿지 않을까 봐 입을 다물고 있지만 앙드레의 모든 얘기는 사실이야.”
요아에 이어 앙드레가 얘기를 계속했다.
“윤사장, 당신이 정말 애니그마 연구소와 무관하다면 엘리시움에 대한 독단적인 통제를 해소해야 하오. 서브시티 거주민들의 자유로운 통행과 생활을 보장하고 구시가지의 생존자들까지 포용한 진정한 엘리시움으로 발전시켜야 마땅하오. 만일 이를 거부한다면 엘리시움은 애니그마 연구소의 지시를 받는 하부조직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소. 당신 또한 애니그마 연구소와의 연관성을 인정해야만 하오.”
실내의 분위기가 숙연해질 만큼 진지한 통보였다.
짝, 짝, 짝!
윤서경은 박수를 치며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좀비 슬레이어가 아니라 대단한 웅변가로군. 모두가 알다시피 엘리시움이 없었다면 서울은 온통 좀비 세상으로 바뀌었을 거네. 헬돔 역시 좀비들에게 둘러싸여 와해되었을 테지. 앙드레, 애니그마 연구소에서 좀비 바이러스를 개발했다는 얘기는 정말 흥미로운 발상이야. 하지만 뱀처럼 간교한 혓바닥으로 헬돔을 선동해 엘리시움을 흔들 생각은 말게.”
윤서경은 오히려 하대수를 설득했다.
“하 사령관, 내가 분명히 얘기하지만 좀비 바이러스는 인류에게 내려진 자연의 형벌이오. 인구폭발을 막으려는 정화 시스템이라고나 할까? 인류가 이번 위기를 극복하게 된다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소. 아마도 좀비 슬레이어는 애니그마 연구소에 대한 개인적 원한 때문에 터무니없는 얘기로 헬돔과 우리 사이를 이간질시키려는 것 같소. 정말 실망했소.”
워낙 유려한 화술에 하대수는 머리가 뜨거워졌다.
앙드레와 요아가 직접 애니그마 연구소 내에서 알아낸 정보이니 믿어야 당연했지만, 윤서경이 입술에 침 한번 바르지 않고 반박하자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요아가 실소를 흘리며 말을 받았다.
“훗, 윤사장. 당신이 순순히 진실을 밝힐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어. 오늘 당신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최후통첩이야. 더 이상 엘리시움이라는 같잖은 이름을 내세워 생존자들을 호도하지 마. 지금 당신한테는 두 가지 길밖에 없어. 애니그마 연구소의 악행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거야. 아니면 목숨이 붙어 있을 때 달아나거나.”
“닥쳐라. 계집!”
황해가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섰다.
“네년이 목숨이 붙어 있을 때 당장 엘리시움에서 껴져!”
상황이 또 다시 격해지자 윤서경이 황해를 다독였다.
“진정하게, 경호국장. 그래도 찾아온 손님인데 예우는 갖춰야지. 우리가 헬돔의 무뢰배들과 같은 수는 없지 않은가?”
하대수가 몸을 일으키며 거칠게 내뱉었다.
“주둥이가 점잖지 못하군, 윤사장. 당신이 결백을 주장하니 지금은 돌아가지.. 하지만 우리는 좀비 바이러스가 애니그마 연구소에서 살포됐음을 믿고 있소. 당신이 애니그마 연구소와 눈곱만치라도 연관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그때는 엘리시움을 날려 버릴 거요.”
그가 돌아서자 김석현과 강철민이 바싹 붙어 수행했다. 이어 앙드레와 요아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앙드레와 하대수 일행이 집무실에서 나가자 황해가 잔뜩 불만스런 표정을 띠었다.
“사장님, 헬돔의 깡패 새끼들한테 메트로레인을 내줄 수는 없습니다. 놈들은 분명 서브시티까지 침범해 올 겁니다.”
“물론일세. 그럴 마음은 전혀 없어.”
윤서경은 백인호에게 넌지시 물었다.
“보안국장, 자네도 내가 애니그마 연구소의 후원을 받아 엘리시움을 창설했다고 믿는 건가?”
“사장님이 부인하신 이상 저는 사장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엘리시움을 위협할 헬돔의 무뢰배들을 제거하게.”
“사장님……?”
“하대수가 헬돔으로 귀환하면 메트로레인 통행권을 요구하며 가까운 서브시티부터 공격해 올 거네. 나는 엘리시움을 지켜야 할 총수로서 저들의 위협을 결코 묵과할 수 없어.”
“…….”
백인호가 답변을 유보하자 윤서경이 그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백 국장, 이는 엘리시움과 서브시티 거주민들을 위한 결단일세. 자네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겠다면 당장 엘리시움을 떠나게.”
“아닙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백인호가 경례를 붙이자 윤서경도 마주 경례로 답했다.
“건투를 빌겠네. 보안국장”
백인호가 나가자 윤서경은 가는 미소를 띠며 담배파이프를 빨았다.
황해가 다소 불만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사장님, 왜 제게 맡기시지 않는 겁니까?”
“백인호의 표정에서 못 느꼈나? 놈은 나를 의심하고 있어?”
“예에? 하면……?”
집무의자에 앉은 윤서경이 탁자 위에 두 발을 얹었다.
“자네는 내 경호에만 만전을 기하면 돼.”
“알겠습니다, 사장님.”
황해가 물러가자 윤서경은 상의 포켓에서 무선 통신기를 꺼내 귀에 꽂았다.
“테네시!”
그는 소지하고 있는 최첨단 스마트 워치를 음성으로 작동시켰다. 곧바로 테네시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예, 윤서경 사장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애니그마 연구실에 침입했던 자들은 모두 죽었다고 했잖아?”
“사실입니다.”
“뭐야? 그럼 내가 만난 앙드레와 요아는 유령이란 말이냐?”
“사장님, 앙드레는 특별한 존재라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해 드릴 수 없습니다. 이는 본사의 방침입니다.”
윤서경의 음성이 격앙되었다.
“이 엘리세움 역시 본사의 지침을 받아 창설됐다. 너는 엘리시움을 지원할 의무가 있어. 한데 내게 거짓 보고를 올렸으니 명백한 직무유기다. 알겠어?”
“저는 임무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아무래도 시스템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 내가 직접 점검해야겠으니 당장 연결통로의 보안장치를 해제해!”
“애니그마 연구실은 접근이 불가합니다. 만일 돌연변이 괴수들이 탈출한다면 좀비보다 백배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 엘리시움을 위협할 겁니다.”
윤서경은 탁자에 올린 두 발을 내렸다.
“판단은 내가 한다. 넌 지시에 따라!”
“죄송합니다. 애니그마 연구소에 위협이 되는 문제는 제 스스로 판단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습니다.”
“테네시, 왜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거냐?”
“저는 임무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따위 소리 집어치워!”
“저는 임무에 충실할 뿐입니다.”
반복되는 답변에 윤서경은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젠장, 고약한 기계덩어리!”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 기계이기에 화를 내봤자 그만 손해였다.
그는 애니그마 연구소 진입 계획을 다음으로 미뤘다.
일단은 헬돔을 제거하는 것이 순서였기에 백인호가 나선 전투를 기대해야 했다. 물론 그는 이번 전투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절대 패할 수 없는 악마적인 계략을 세워놓았던 것이다.
Written by : Mich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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