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ré’s Choice: In a Broken World”
“Seoul Forest, Seongsu-dong”
성수동 서울숲.
좀비들이 지상을 지배하기 전, 서울숲은 서울 시민들에게 평온함과 여유를 선사하던 강북의 대표적인 공원이었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고 사슴과 고라니가 노니는 그곳에서, 어린아이들은 동물들에게 직접 먹이를 주며 웃음꽃을 피웠고, 연인들은 산책로를 따라 손을 잡고 데이트를 즐기며 추억을 쌓았다. 서울숲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시 속의 작은 안식처였다.
그러나 지금, 그 평화로움은 완전히 사라졌다. 숲은 마치 밀림처럼 우거져 있었고,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덤불들이 빽빽하게 자라나 도심 속 정글을 방불케 했다. 그 옛날 사람들이 거닐던 길은 이제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숲은 길을 잃은 야생의 신비로 가득 차 있었다.
울창한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그러나 그 맑음은 묘한 불안을 자아냈다. 이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한편, 인간은 그 존재감마저 희미해지고 있었다.
세상이 좀비들에 의해 뒤바뀌면서 가장 눈에 띄게 변한 것은 바로 지구의 환경이었다. 한때 도로를 가득 메우며 매연을 내뿜던 자동차들은 멈췄고, 공장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연기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산업혁명 이후 끊임없이 대기를 오염시키던 인간들은 마치 석기시대로 돌아간 듯, 도시의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 결과, 지구의 공기는 오랜만에 놀랍도록 깨끗해졌다.
심지어 봄부터 여름까지 한반도를 괴롭히던 중국발 황사마저 사라졌다. 인간의 개발로 황폐화되었던 고비사막이 점차 초지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자 스스로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지구의 주인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멸종하지 않았듯, 좀비들이 지구의 새로운 주인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이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과 좀비의 대결은 이제 시작이었다.
사락사락…
울창하게 자란 덤불을 헤치는 손톱에는 검은 때가 잔뜩 끼어 있었다. 하지만 그 덤불 사이로 고개를 내민 이는 의외로 앳된 청년이었다. 청년은 정상적인 세상이었다면 학교에서 친구들과 수업에 집중하고 있어야 할 고등학생 나이였지만, 지금 그의 얼굴엔 덕지덕지 위장약이 발라져 있었다. 전투에 나선 병사처럼 말이다.
권총을 쥔 손은 바싹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고, 청년은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그곳에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유빈.
유빈은 헬돔 내에서 기초 훈련을 마친 뒤, 처음으로 야외 훈련에 나섰다. 훈련이라고는 하지만, 바깥세상에서는 언제 어디서 좀비가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이곳은 곧 실전과 다름없었다.
주변에서는 김석현 교관과 헬돔의 전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지만, 좀비가 나타난다면 그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곳의 현실은 단 하나였다.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
“후아후아…”
유빈은 고동치는 심장을 감싸 쥐었지만,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그저 이 공포스러운 훈련이 빨리 끝나길 바랐지만, 훈련 종료를 알리는 교관의 휘슬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바스락!
갑자기 측면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유빈의 가슴은 순식간에 덜컥 내려앉았다.
“수상한 낌새를 느끼면 무조건 쏴라!”
김석현 교관의 훈령이 환청처럼 그의 고막을 울렸다.
“쏘… 쏜다!”
유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며 인기척이 들려온 곳에 권총을 겨누었다. 다행히도, 풀숲을 밟는 인기척은 멈췄고,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유빈은 자신의 과민 반응이라고 생각하거나,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였다고 지레 짐작했다.
그러나 그가 몸을 채 돌리기도 전에, 발밑에서 누군가 불쑥 일어섰다.
“카우우!”
입을 벌리며 드러난 누런 이빨이 유빈의 눈앞에 나타났다.
유빈은 그 순간 기겁을 하며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정신은 이미 반쯤 나가 있었고, 그의 몸은 마치 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상대는 유빈의 목을 덥석 움켜쥐더니, 순간적으로 깨물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은 죽어서 좀비로 변하는 것이었다. 헬돔의 전사들은 좀비들에게 뜯길 상황이 오면 차라리 자결을 택했다. 머리에 총을 쏴 좀비로 변하지 않기 위한 죽음은 그들에게 명예로운 선택이었다.
김석현 교관은 이 철칙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해서 가르쳤지만, 그 순간 절망에 빠진 유빈은 손에 쥐고 있던 권총마저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이상했다. 상대는 유빈의 목을 깨물지 않고, 오히려 혀로 핥기 시작했다. 끈적거리는 침이 얼굴을 따라 흘러내렸다.
“헤헷, 새끼. 완전히 얼이 빠졌구나?”
유빈은 비로소 끔찍한 공포에서 벗어나 숨을 몰아쉬었다.
“자… 장훈 선배님…?”
상대는 좀비가 아니었다. 위장약으로 좀비처럼 분장한 헬돔의 전사 장훈이었다.
장훈은 유빈의 머리를 마구 헝클며 말했다.
“이런 한심한 자식을 봤나? 내가 진짜 좀비였으면 어쩔 뻔했어? 권총은 폼으로 들고 다니냐?”
장훈은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집어들었다. 그때, 유빈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은 것을 본 장훈은 코를 쥐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휴, 냄새. 오줌까지 지린 거냐?”
유빈은 사타구니에서부터 바짓가랑이까지 축축하게 젖어버린 자국을 보며 눈물이 글썽거렸다. 너무도 놀란 상태에서 긴장이 풀리며 자신도 모르게 오줌을 지린 것이었다.
“흑, 저는 아무래도… 전사가 될 수 없나 봐요.”
유빈은 울음을 터뜨렸다.
장훈은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유빈, 나도 훈련병 때는 너처럼 징징 짰어. 하지만 실전에서 좀비 한 마리를 죽이고 나니까, 용기가 생기더라고. 처음이 어렵지, 한 번 맞서고 나면 별거 아니야.”
유빈은 눈물에 젖은 얼굴로 물었다.
“정말이에요?”
장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좀비들이 아무리 빨라도 총알보다 빠르겠냐? 물리지만 않으면 돼. 놈들이 눈앞까지 달려들어도 절대 겁먹지 말고, 대가리에다 총알을 박아주면 돼. 이렇게, 탕!”
장훈은 유빈의 이마에 대고 장난스럽게 방아쇠를 당겼다.
틱!
“악!”
공포에 질린 유빈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순간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장훈은 빈 권총을 유빈의 손에 쥐어주며 피식 웃었다.
“인마, 장전이 안 된 총이었어. 훈련병들이 아무렇게나 쏘아댈 수 있는데, 어떻게 장전된 총을 주겠냐?”
유빈은 안도하면서도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빈총이라고요? 그러다 진짜 좀비를 만났으면 어쩔 뻔했어요?”
장훈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걱정 마. 헬돔 주변에는 좀비들이 없어. 게다가 이렇게 햇살이 쏟아지는 화창한 날에는 놈들도 나들이를 안 나와. 놈들은 승냥이처럼 어두운 밤을 좋아하지.”
그러나 유빈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울창한 숲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기는 햇볕도 잘 들지 않는데…”
바로 그때였다.
가까운 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며, 요란한 총성이 함께 터져 나왔다.
“아아악!”
투투투–!
일순 장훈의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니미, 어떻게 된 거야?”
그는 한쪽 귀에 꽂은 무선 교신기를 켰다.
“교관님, 어떻게 된 겁니까?”
통신기를 통해 김석현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주변에 좀비 새끼들이 깔렸다! 어서 훈련병들을 이끌고 헬돔으로 귀환해!”
“무슨 소립니까? 순찰대 보고로는 좀비들이 전혀 없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알아? 좀비들이 잠복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장 귀환해!”
교신이 중단되면서 다시 총성이 들려왔다.
투투투–탕탕–!
장훈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좀비 새끼들이 잠복하고 있었다고? 아니, 그 흉측한 괴물들이 어떻게 그런 지능까지 지닐 수 있다는 거야?”
어쨌거나 서울숲에 좀비들이 깔려 있다면 속히 훈련병들을 이끌고 헬돔으로 귀환해야 했다.
장훈은 어깨에 멘 K1A소총을 풀어 유빈의 손에 쥐어 주었다.
“받아라, 유빈. 좀비 놈들과 맞닥뜨리면 무조건 대가리를 쏴. 반드시 대가리를 쏴야 죽일 수 있다. 이 케이원에이 소총은 아주 잘 맞으니 겨냥만 제대로 하면 돼.”
“선배님은요?”
“난 이 권총이면 충분해.”
장훈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쥐고는 유빈에게 농을 걸었다.
“유빈, 제발 부탁이니 내 등에다 대고 쏘지만 마.”
“아… 알았습니다.”
“그럼 내 뒤에 바싹 붙어.”
장훈은 풀숲을 헤치고 나서면서 주변을 향해 외쳤다.
“훈련병들은 어서 귀환하라!”
그러자 덤불과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어린 훈련병들이 뛰쳐나와 함께 달렸다. 훈련병들 중에는 유빈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도 끼어 있었다.
서울숲에서 헬돔까지는 먼 거리가 아니다. 울창한 숲만 벗어나면 견고한 본부에 이를 수 있다. 헬돔 입구에 근접하기만 하면 보초들이 KM7기관총으로 지원해 줄 것이다.
한데 숲을 절반도 벗어나기도 전에 좀비들이 괴성을 지르며 덤불 속에서 뛰쳐나왔다.
“카우우우!”
좀비들은 마치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사냥감을 발견한 듯 훈련병들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어서 피해!”
장훈은 연속으로 권총을 쏘아대며 훈련생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탕, 탕, 탕!
앞서 달려들던 좀비들이 나자빠졌지만 권총 한 자루로 십여 구에 달하는 좀비들을 모두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짐승처럼 네 발로 달려든 좀비 두 구가 장훈의 다리를 덥석 물어뜯었다.
“아악!”
살점이 뜯겨나가는 고통보다 좀비에게 물렸다는 절망감이 더 깊었다.
“이런 흉측한 괴물 새끼!”
권총의 실탄이 떨어지자 장훈은 단검을 꺼내 좀비들의 머리를 마구 찍었다.
그는 좀비들에 의해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좀비 한 구의 목을 잘라냈다. 이어 그는 자신의 목에 단검을 들이댔다. 죽어서 좀비가 되느니 아예 자신의 목을 베겠다는 의도였다.
순간 연이은 총성과 함께 좀비들의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퍽, 퍽, 퍽!
몸에 달라붙은 좀비들이 모두 나가떨어지자 장훈은 놀란 눈으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몸에 착 달라붙은 검은 가죽옷 차림의 여인.
여인이 손에 쥐고 있는 UMP45 기관단총에서 총연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모습에서 여전사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여인을 본 장훈의 입가에 절로 웃음기가 감돌았다.
“요… 요아 순찰대장?”
그러했다. 매력적인 모습의 여전사는 다름 아닌 헬돔의 순찰대장 요아였다.
“그래, 나야.”
“살아 있었군. 모두가 죽은 줄 알고 있는데…….”
“좀비 따위한테 죽을 내가 아니잖아?”
요아는 좀비에게 물려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장훈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장훈. 내가 조금 늦었군.”
“아니야. 아주 적시에 왔어. 나 좀 죽여 줘. 내 스스로 목을 따는 게 쉽지 않아서 말이야.”
요아의 눈에 안쓰러움이 감돌았다.
“장훈…….”
“죽어도 좀비는 되지 않는다. 그게 우리 헬돔의 원칙이잖아? 어서 쏴.”
장훈의 의연한 모습에 요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무리 헬돔의 원칙이라지만 감염된 동료를 사살해야 하는 규정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모두들 위해서, 또한 스스로 죽기를 원하는 장훈을 위해서도 죽여주어야만 했다.
요아는 총구로 장훈을 겨냥한 채 눈을 감았다.
“그래, 이제 편히 쉬어.”
타앙!
총성과 함께 장훈이 뒤로 쓰러졌다. 구멍 난 미간을 통해 피가 흘렀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눈을 뜬 요아는 장훈의 시신을 향해 잠시 애도를 표하고는 돌아섰다.
“제기, 귀환하자마자 기분이 엿 같네.”
훈련병들은 아우성을 치며 풀숲을 헤치고 달려갔다.
“살려 주세요!”
“여기에요!”
훈련병들은 나무 사이로 멀리 보이는 헬돔을 향해 외쳤지만 지원을 받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카우우!”
괴성을 외치며 달려드는 좀비들이 등 뒤까지 바싹 따라붙었다. 훈련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려 하자 유빈이 외쳤다.
“내가 맡을 테니 모두 헬돔으로 달려가!”
유빈은 좀비들을 향해 장훈이 건네준 K1A 기관단총을 겨누었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동안 쇠사슬에 묶여 있는 좀비들을 사살하는 훈련을 받았지만 이렇듯 외부의 좀비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좀비들이 괴성이 고막을 자극했고 고약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카우우!”
좀비들이 악귀처럼 달려들자 유빈은 이를 악물며 방아쇠를 당겼다.
투투투!
5.5mm 소총탄이 불을 뿜듯이 발사되었다. 적중된 좀비들이 충격으로 나가동그라졌다가 다시 벌떡벌떡 일어섰다. 머리를 맞추지 못한 탓이다.
유빈은 가슴이 터질 듯한 두려움 속에서 장훈의 지침을 떠올렸다.
‘맞아. 머리를 쏘아야 한다고 했어!’
그는 좀비의 머리를 조준했지만 단발로 바꿔놓지 않았기에 또 다시 연사로 발사되면서 총구가 허공으로 향했다. 총을 제대로 주체하지 못한 유빈은 아득한 절망으로 추락했다.
“카아아!”
펑크머리의 좀비가 유빈의 팔을 쥐고는 입을 쩍 벌렸다.
극한의 공포.
유빈은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이 순간 측면에서 날아든 군홧발이 펑크머리 좀비의 안면을 강타했다.
퍼억!
대번에 머리통이 박살낸 좀비가 5미터 밖으로 나가동그라졌다.
유빈 옆으로 내려선 사람은 건장한 체구의 청년으로 군용 점퍼를 착용하고 있었다. 어깨에는 시그556 소총을 둘렀고 손에는 정글도를 쥐고 있었다.
“두려워 마라.”
청년은 유빈의 쥔 소총의 총구를 좀비 쪽으로 겨누고는 엄중하게 지시했다.
“좀비의 머리를 겨냥해서 쏴.”
“저… 저는…….”
“어서!”
우람한 체구의 좀비가 허공을 할퀴며 청년을 향해 달려들었다. 청년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피하지 않고 유빈에게 다시 지시했다.
“네가 좀비를 맞추지 못하면 난 죽는다.”
유빈은 이를 질끈 깨물었다.
‘나를 구해준 아저씨야. 이 아저씨가 나 때문에 죽으면 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거야!’
총구는 청년이 쥔 채 겨누고 있기에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 일이었다.
타앙!
요란한 총성과 함께 대머리 좀비의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청년은 담담한 미소를 띠며 덜덜 떨고 있는 유빈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잘했다. 실전보다 훌륭한 훈련은 없지. 넌 이제 전사가 되었다.”
이때 여덟 구의 좀비들이 괴성을 지르며 풀숲에서 튀어나왔다. 이미 인육을 뜯어먹었는지 입가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카우우!”
여덟 구의 좀비가 동시에 달려들자 청년은 유빈을 뒤로 밀어냈다.
“물러서 있어.”
청년은 달려드는 좀비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그의 정글도가 번득일 때마다 좀비들의 머리통이 치솟아 올랐다.
퍽–퍽–!
청년은 아주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인 듯 좀비들의 공격 속에서도 차분하게 정글도를 휘둘러 좀비들의 목을 날려버렸다.
유빈은 청년의 모습이 왠지 눈에 익었다. 문득 그는 열흘 전쯤 헬돔을 찾아온 방문객을 떠올렸다.
“아, 그 아저씨야!”
당시 유빈은 헬돔 내에서 좀비 사살을 훈련받던 중이었다. 계집아이 좀비를 차마 죽이지 못해 위기에 몰렸는데 누군가 그를 구해주었기에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맞아, 앙드레 아저씨!”
그러했다. 단지 정글도만으로 좀비들을 상대하는 청년은 바로 앙드레였다. 치열한 메트로레인 전투를 거쳐 애니그마 연구소로 진입했던 그가 돌아온 것이다.
앙드레는 좀비들의 목을 모두 베고는 정글도에 묻은 피를 바닥에 뿌렸다.
“다친 데는 없지?”
앙드레가 다가서자 유빈은 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렸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또 저를 구해주셨군요.”
“또라고? 나를 알아?”
“물론입니다. 지난번 헬돔에 오셨을 때 계집아이 좀비한테 물릴 뻔한 저를 구해주셨잖아요?”
앙드레도 당시 보았던 어린 청년을 기억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기억난다. 한데 좀비 사냥에 나서려면 훈련을 더 거쳐야겠구나.”
“사실 훈련 중이었습니다.”
“하면 헬돔에서 훈련병들을 실전에 투입시킨 거냐?”
“그게 아니라 야외 훈련 중이었어요. 순찰대원들이 미리 서울숲을 수색해 안전을 확인했는데 좀비들이 잠복해 있는 바람에 미처 찾아내지 못했대요. 그게 가능한가요, 아저씨?”
“충분히 가능해. 좀비들은 그보다 더한 전술도 펼칠 수 있다.”
유빈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은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 그렇군요. 참, 제 이름은 유빈이에요.”
“그래, 네 이름이 유빈이었군.”
앙드레는 유빈과 훈련병들을 대동해 풀숲을 헤치고 걸으며 좀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유빈, 좀비들도 진화하고 있다. 놈들은 잠복뿐만 아니라 병기도 다룰 수 있지.”
“예에? 병기까지요?”
“그 이상의 능력을 지닐 수도 있겠지. 놈들의 진화 속도가 빠르지 않기를 바라야 돼.”
앙드레가 훈련병들과 함께 서울숲을 나서자 헬돔 전사들과 어울려 있던 요아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 여기 있어. 앙드레!”
앙드레보다 유빈이 먼저 요아에게 달려갔다.
“요아 누나! 살아 있었던 거야?”
“가만, 너 유빈이구나? 훈련병 주제에 어쩌자고 헬돔 밖으로 나선 거야?”
“그렇게 됐어.”
요아는 유빈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다친 데는 없는 거니?”
“난 괜찮아. 앙드레 아저씨가 구해주셨어.”
“오, 정말 다행이야.”
요아는 목각인형처럼 차가운 표정의 김석현을 직시하며 매섭게 질책했다.
“카론 교관, 당신의 부주의 때문에 아까운 전사들과 훈련병들이 희생됐어!”
김석현은 억양이 없는 단조로운 어조로 응수했다.
“덕분에 훈련병들이 제대로 실전 훈련을 마쳤다. 이제 좀비 들을 사냥할 전사로 내보내도 되겠어.”
그는 크레인에 의해 서서히 내려지고 있는 컨테이너 박스로 향했다.
“귀환한다!”
요아는 앙드레와 함께 컨테이너 박스로 향했다.
“저치는 피도 눈물도 없어. 그래서 카론으로 불리게 된 거지.”
“카론이라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뱃사공?”
“훗, 아주 무식하지는 않네? 카론은 전사들을 지옥으로 안내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지.”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 훈련 방식도 마음에 들어. 지금 세상에서는 저런 훈련교관이 필요하지.”
“치이, 앙드레의 피도 카론만큼 차가운 줄 몰랐네?”
요아는 다정하게 앙드레의 팔짱을 끼었다.
“물론 좀비와 싸울 때는 누구보다 뜨겁지만.”
헬돔의 열린 천장을 통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돔구장은 더 이상 야구를 즐길 수 없을 만큼 황폐해졌으며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헬돔 전사들을 양성하기 위한 훈련장이 된 것이다.
내야석 가까운 곳에 마치 옥타곤 격투기장 같은 팔각형 철장이 설치돼 있었다. 철장 주변으로 무장한 전사들이 둘러서 있었고 내야석에는 일반 시민들이 여기저기 앉아 관전 중이었다.
“카우우!”
옥타곤 철장 안에서 좀비 몇 구가 괴성을 지르며 한 명의 전사를 공격하고 있었다.
좀비들은 쇠사슬이나 족쇄로 결박되지 않았기에 자유로운 상태였다. 이런 좀비들을 상대로 혼자서 분투하고 있는 전사는 아주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였다. 상반신에 가죽조끼만 한 장 달랑 걸쳤는데 드러난 팔과 가슴 근육이 철갑처럼 단단해 보였다.
전사는 권총 한 자루 착용하지 않은 채 오직 낫처럼 휘어진 쌍칼만으로 좀비들을 상대했다.
퍽–퍽–!
대번에 좀비 둘의 대가리를 날려버린 전사는 철장을 박차고 빠르게 이동했다.
“굼벵이 좀비 새끼들! 날 쫓아와 봐!”
외부로 도주할 수도 없는 폐쇄공간에서 좀비들을 상대로 이렇듯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사람도 드물다. 그가 공중제비에 이어 다시 좀비 두 구의 목을 베자 내야석의 관전자들이 열광적인 함성을 보냈다.
“와아아!”
“역시 글라스타야!”
“헬돔 최고의 전사 글라스타!”
내야석 상단의 통로를 따라 이동하던 요아가 앙드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글라스타가 출전했어. 잠시 보고 가.”
“저 사람 이름이 글라스타야?”
“응, 이곳 헬돔에서 최강의 전사라 할 수 있지.”
“그래? 난 요아가 헬돔 최강의 전사로 알았는데?”
“치이, 칭찬으로 들을게. 뭐, 나야 여전사들 중에서는 최강이라 할 수 있지.”
요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참, 글라스타란 별명은 글라디아토르라는 로마검투사들의 직업에서 비롯된 거야. 본래 이름은 강철민이지.”
앙드레는 기억을 더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투사라면 글라디에이터 아닌가? 예전에 영화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글라디에이터는 영어식 발음이야. 로마식 발음으로는 글라디아토르가 맞아. 스타는 이곳 전사들 중에서 으뜸임을 의미하지.”
“흐음, 그래서 글라스타로군.”
앙드레는 옥타곤 철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철민는 좀비 네 구에 둘러싸인 채 철장을 등지고 있었다.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강철민은 쌍칼을 빙글빙글 돌리며 한껏 여유를 부렸다.
“자자, 어서 와라! 얼른 끝내고 맥주나 마셔야겠다.”
오히려 내야석에서 관전하는 사람들이 가슴을 졸여야 했다.
“카우우!”
네 구의 좀비가 동시에 달려들자 강철민은 칼을 내리쳐 전면의 좀비를 대번에 쪼개 버렸다. 동시에 옆차기로 좌측의 좀비를 걷어차고는 몸을 틀면서 두 자루 칼을 교차시켰다.
퍽–퍽–!
좀비 두 구의 대가리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걷어차인 좀비가 꿈틀거리며 일어서려 하자 강철민은 군홧발로 좀비를 대가리를 밟아 으스러뜨렸다.
혼자서 좀비 12구를 모두 해치운 강철민은 쌍칼을 바닥에 꽂고는 양손을 번쩍 쳐들었다.
“헬돔 만세!”
이에 관전자들이 모두 일어서서 박수갈채를 보냈다.
“와아아!”
“글라스타–글라스타–!”
앙드레는 이를 쓸어보며 나직이 뇌까렸다.
“마치 로마 검투장 같은 분위기로군.‘
한데 나자빠진 좀비 한 구가 벌떡 일어서며 강철민의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목이 절반쯤 잘려 달랑거렸지만 뇌신경이 온전하게 끊이지 않았는지 그런 형태로도 되살아난 것이다.
일순 관전자들의 함성이 가라앉으면서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목이 반쯤 잘린 좀비가 강철민 뒤로 바싹 다가서며 날카로운 손톱을 곤두세웠다. 좀비 바이러스는 워낙 침투가 빨라 단지 좀비의 손톱에 긁히는 것만으로 감염이 된다.
이를 본 앙드레가 매그넘 권총을 뽑아들려 하자 요아가 제지했다.
“그냥 지켜 봐.”
좀비가 손톱을 휘두르자 강철민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빙글 공중제비를 돌아 솟구쳤다. 이어 회전발차기를 전개하자 좀비의 대가리가 수박 터지듯이 박살났다.
관전자들은 그제야 안도하며 더 큰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와아아아!‘
요아 역시 웃음을 띠며 박수를 쳤다.
“어때? 쇼가 볼만하지?”
“굉장하군. 격투 능력이 아주 탁월해.”
“과거 옥타곤 격투 대회에 출전한 경험이 있는 전형적인 투사야. 현재 우리 헬돔에서 전술대장을 맡고 있지.”
“저런 전사가 있다면 헬돔의 방위는 안심해도 되겠어.”
앙드레는 난간에 바싹 붙어서서 손을 흔드는 아이들과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들을 유심히 살폈다.
“의외로 아이들이 많군.”
“저들은 본래 우리 헬돔 소속은 아니었어. 구시가지에서 살던 하리잔들이었는데 좀비들의 위협이 심해지자, 독자적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없자 우리 헬돔으로 귀속된 거야. 이곳에서는 적어도 안전은 보장되니까.”
“보기가 좋군.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희망적이야.”
“그렇기는 하지만 지나친 기대는 마.”
요아는 쓴웃음을 띠며 덧붙였다.
“태어나는 아이보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백배는 더 많으니까.”
Written by : Mich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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