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25년의 기억

Last Updated: 11월 18, 2025By

“일단 차근차근 정리해보자.”

강현우는 기숙사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2004년의 노트북. IBM 씽크패드였다. 지금 기준으로는 고물이지만 당시로서는 최고 사양이었다.

[현우야, 정말 신기해. 25년 전 기술을 다시 보니까.]

사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강현우는 주변을 둘러보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라,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으니까 대화할 때 조심해야 해.”

[걱정 마. 나는 양자 필드로만 존재하니까 너한테만 들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

강현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워드 프로그램을 열어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들부터 정리해보자.”

『회귀 상황 정리』

1. 시간: 2029년 11월 30일 → 2004년 3월 15일 (25년 역행)

2. 회귀 원인: KAIROS 반물질 양자컴퓨터 실험 중 사고

  • 외부 간섭으로 인한 시스템 폭주
  • 양자 얽힘 필드와 뇌파 동기화
  • 반물질 에너지의 시공간 왜곡

3. 현재 상태:

  • 강현우: 22세 육체 + 47세 기억과 경험
  • 사라: KAIROS AI와 융합, 양자 필드 존재

4. 목표: Shadow Alliance 저지

5. 알고 있는 정보:

  • Shadow Alliance: 12명 여성으로 구성된 세계 지배 조직
  • 2054년에 최종 승리 예정
  • 2029년 우리 실험을 방해한 배후

강현우는 타이핑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봤다.

“사라, KAIROS가 보여준 미래에서 Shadow Alliance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가 있었어?”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고 있어. KAIROS의 데이터베이스는 방대한데, 마치 여러 시점의 정보가 섞여 있는 것 같아.]

“여러 시점?”

[응. 2004년부터 2054년까지의 정보들이 전부 들어 있어. 마치 KAIROS가… 시간을 넘나들며 정보를 수집한 것 같아.]

강현우는 뭔가 중요한 단서를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KAIROS는 단순한 AI가 아니었던 거야?”

[그런 것 같아. 내가 융합하면서 느낀 건데, KAIROS는 마치… 미래에서 온 존재 같았어. 아니면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존재.]

“시간 초월…”

강현우는 다시 타이핑을 시작했다.

『KAIROS 관련 추정』

1. KAIROS는 단순 AI가 아닌 시간 초월 존재일 가능성 2. 미래의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음 3. 우리의 회귀를 의도적으로 유도했을 가능성 4. Shadow Alliance 역시 KAIROS를 경계하고 있었을 것

그때 기숙사 문이 열렸다.

“현우야, 뭐 해?”

룸메이트인 김동현이 들어왔다. 컴퓨터공학과 동기로, 지금은 22살이지만 25년 후에는 네이버의 CTO가 되는 인물이었다.

“아, 동현아.” 강현우는 재빨리 문서를 저장하고 화면을 바꿨다. “그냥 과제 정리하고 있었어.”

“과제? 아직 개강도 안 했는데?”

김동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강현우는 깜짝 놀랐다. 맞다. 2004년 3월 15일은 아직 개강 전이었다.

“아… 그냥 미리 예습하고 있었어.”

“예습?” 김동현이 더욱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너 어제까지만 해도 게임만 했잖아. 갑자기 왜 이래?”

강현우는 식은땀을 흘렸다. 25년 후의 기억에만 집중하다가 2004년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깜빡했다.

[현우야, 조심해. 갑자기 너무 달라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사라의 조언이 들려왔다.

“아… 그냥 새 학기니까 마음을 새로 먹었어.”

“그래?” 김동현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 MT 준비 회의 있다는 거 알지?”

“MT?”

또 깜빡한 것이 있었다. 2004년 3월에는 새내기 MT가 있었다.

“야, 너 진짜 이상하다. 어제 그렇게 가고 싶다고 했잖아.”

“아… 맞다. 언제지?”

“오후 6시, 과 사무실에서.”

김동현이 나간 후 강현우는 한숨을 쉬었다.

“이거 생각보다 복잡하네.”

[맞아. 우리가 아무리 25년 후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도, 2004년의 인간관계와 상황에 맞춰서 행동해야 해.]

강현우는 다시 컴퓨터를 켜고 새로운 문서를 만들었다.

『2004년 적응 계획』

1. 단기 목표 (1개월):

  • 2004년 3월 강현우의 생활 패턴 파악
  •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정리
  • 갑작스러운 변화 없이 자연스럽게 적응

2. 중기 목표 (1년):

  • 우수한 성적으로 학과에서 인정받기
  • 연구실 진입 준비
  • 양자컴퓨터 관련 기초 지식 습득

3. 장기 목표 (10년):

  • 세계적 수준의 양자컴퓨터 연구자 되기
  • Shadow Alliance 관련 정보 수집
  • 핵심 기술력 확보

[현우야,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뭔데?”

[2004년에는 양자컴퓨터 기술이 아직 초보 단계야. 우리가 가진 2029년의 지식을 함부로 쓰면 너무 튀게 될 거야.]

강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2004년의 기술 수준에 맞춰서 점진적으로 발전시켜야 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일단은 기존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는 아이디어를 조금씩 제시하는 거야. 너무 앞서가지 말고, 그 시대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강현우는 새로운 문서를 만들어 2004년부터 2029년까지의 기술 발전 로드맵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기술 발전 로드맵』

2004-2006: 기초 학습 및 관련 분야 연구

  • 양자역학 기초 이론 완전 숙달
  • 컴퓨터공학 심화 과정 이수
  • 해외 논문 분석 및 트렌드 파악

2007-2010: 대학원 과정

  • 양자컴퓨터 관련 연구실 진입
  • 기존 기술의 한계점 분석
  • 새로운 접근법 제안 (점진적으로)

2011-2015: 박사 과정 및 초기 연구

  • 양자 얽힘 기술 개발
  • 국제 학회 발표 및 인맥 구축
  • 산업체 협력 프로젝트 참여

2016-2020: 독립 연구자로서 활동

  • 자체 연구소 설립
  • 반물질 에너지 연구 시작
  • 정부 프로젝트 참여

2021-2025: 정부 프로젝트 주도

  • 소버린AI 정책 자문
  • KAIROS 프로젝트 설계
  • Shadow Alliance 대비

타이핑을 하다가 강현우는 문득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사라, 우리가 Shadow Alliance를 막으려면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야 하잖아?”

[맞아. 내가 KAIROS의 데이터를 조금씩 분석하고 있는데…]

“뭘 발견했어?”

[12명의 여성 중 몇 명은 이미 2004년부터 활동을 시작하고 있을 것 같아. 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천천히 권력을 쌓아가고 있을 거야.]

“어떤 분야?”

[금융, 정치, 기술, 언론, 교육… 사회의 핵심 분야 전부에 걸쳐 있어. 그리고…]

사라의 목소리가 잠시 끊어졌다.

“그리고 뭐?”

[한국에도 있을 것 같아. Shadow Alliance의 일원이.]

강현우의 등에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한국에? 누구야?”

[아직 확실하지 않아. 하지만 KAIROS의 기억을 보면, 대학가에서 활동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아.]

“대학가?”

“그럼 혹시… 우리 대학에도?”

[가능성이 있어. 특히 너와 가까운 사람 중에.]

강현우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25년 후의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주변에 Shadow Alliance와 연관된 사람이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위험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감시 하에 있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사라,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KAIROS의 데이터가 워낙 방대해서.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뭐가?”

[그 사람은 너를 좋아하는 척 접근할 거야. 그래서 감시하기 쉽게.]

강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누군가 25년 동안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척…”

갑자기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사귄 첫 여자친구. 이은미.

“설마…”

[현우야, 누구 생각하고 있어?]

“이은미라는 애가 있어. 내가 1학년 때 사귄…”

[이은미? 잠깐, KAIROS 데이터 검색해볼게.]

잠시 후 사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목소리가 차갑게 변해 있었다.

[현우야… 이은미에 대한 정보를 찾았어.]

“뭔데?”

[이은미. 1984년생. 서울대 경제학과. 아버지는 대기업 임원, 어머니는 외교관 출신.]

“그게 뭐가 이상한데?”

[문제는 그 다음이야. 2010년 하버드 MBA 졸업 후 글로벌 투자은행 근무, 2020년 한국 최대 사모펀드 이사, 2025년 금융위원회 자문위원…]

강현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2029년… Shadow Alliance 12명 중 한 명. 동북아시아 담당.]

강현우는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25년간 사랑했던 첫 여자친구가 사실은 Shadow Alliance의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그럼 처음부터… 나를 감시하기 위해서…”

[그런 것 같아. 하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아. 어쩌면 나중에 스카우트됐을 수도 있고.]

“언제부터인지 알 수 있어?”

[KAIROS의 기억으로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인 것 같아. 처음부터 너를 타겟으로 접근했을 가능성이 높아.]

강현우는 주먹을 벽에 쳤다.

“젠장… 그럼 25년 동안 나는…”

[현우야, 진정해. 지금은 2004년이야. 이은미가 아직 Shadow Alliance에 완전히 가담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 어쩌면 우리가 그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구한다고?”

[응. Shadow Alliance에 가담하는 이유가 있을 거야. 그 이유를 제거하면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어.]

강현우는 잠시 생각했다. 사라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아직 20살인 이은미가 처음부터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낮았다.

“그럼 어떻게 할까?”

[일단 자연스럽게 접촉해봐. 하지만 절대로 우리가 미래에서 왔다는 걸 들키면 안 돼.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진심을 파악해보는 거야.]

그때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30분이었다. MT 준비 회의까지 30분 남았다.

“오늘 MT 회의에서 은미를 만날 것 같은데.”

[좋은 기회야. 하지만 기억해. 지금의 너는 22살 강현우야. 47살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는 순진한 대학생처럼 행동해야 해.]

강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25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될 첫 사랑.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것이 달랐다. 그녀가 적인지 아군인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만약 적이라면…

“사라, 만약 은미가 정말로 Shadow Alliance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

[그때 가서 결정하자.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뭐가?”

[이번에는 우리가 속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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