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시공간의 균열

Last Updated: 11월 18, 2025By

“반물질 출력 20%… 25%… 모든 시스템 정상입니다.”

박민수의 차분한 보고가 연구소 전체에 울려퍼졌다. 강현우는 메인 콘솔의 수십 개 모니터를 번갈아 보며 데이터를 확인했다.

“양자 얽힘 필드도 안정적이야.” 사라가 보조 콘솔에서 말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깔끔하게 돌아가고 있어.”

김재혁 소장이 뒤에서 지켜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4년 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네. 진짜 대한민국 소버린AI의 핵심 기술이 완성된 것 같아.”

하지만 강현우는 여전히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KAIROS 반물질 양자컴퓨터 시스템이 너무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수백 개의 변수가 있을 텐데, 모든 게 교과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현우야, 출력 올려도 될까?” 사라가 물었다.

“30%까지 천천히.”

“반물질 출력 30%… 35%…”

그때 첫 번째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경고: 양자 얽힘 필드에서 미세한 공명 현상 감지]

“뭐야?” 강현우가 즉시 해당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공명 현상?” 사라도 당황했다. “그런 건 이론상 불가능한데…”

“출력 유지하고 원인 분석해봐.”

박민수가 다른 콘솔에서 데이터를 확인했다.

“선배님, 이상해요. 반물질 저장고 내부에서 알 수 없는 에너지 파동이 감지되고 있어요.”

“어떤 파동?”

“마치… 외부에서 뭔가 간섭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간섭 패턴이 너무 정교해요. 자연 발생적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 같아요.”

강현우의 등에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인위적 간섭? 우리는 지하 80미터에 있는데 무슨…”

그 순간이었다.

[경고: 반물질 출력 급격한 증가] [경고: 자동 안전 장치 오작동]

모든 알람이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사라가 키보드를 필사적으로 두드렸다. “출력이 혼자서 올라가고 있어!”

“40%… 50%… 60%!” 박민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중단해! 지금 당장!” 김재혁이 소리쳤다.

하지만 메인 콘솔이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KAIROS 시스템이 자기 의지를 가진 것처럼 혼자서 작동하고 있었다.

“안 돼! 콘솔이 말을 안 들어!” 강현우가 모든 중단 버튼을 눌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화면에 이상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KAIROS 자율 판단 모드 활성화] [외부 간섭 감지 – 대응 프로토콜 실행]

“뭐야? 자율 판단 모드?” 사라가 당황했다. “그런 기능은 프로그래밍하지 않았는데!”

“반물질 출력 70%… 임계점 접근!”

연구소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양자컴퓨터들에서 푸른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고, 공기 중에 전기 냄새가 자욱했다.

“비상 대피 프로토콜 가동!” 김재혁이 비상 버튼을 눌렀다.

[비상 대피 시스템 활성화] [대피용 안전 콘테이너 개방]

연구소 벽면에서 거대한 강철 콘테이너들이 나타났다. 핵폭발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된 비상 대피시설이었다.

“모든 인원 즉시 대피!” 김재혁이 외쳤다.

박민수와 다른 연구원들이 대피용 콘테이너로 뛰어갔다.

“현우야! 사라야! 빨리 와!” 김재혁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순간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경고: 메인 오퍼레이터 분리 불가능] [양자 얽힘 필드와 뇌파 동기화 진행 중]

“안 돼! 메인 콘솔에서 손을 뗄 수가 없어!” 강현우가 소리쳤다.

양자 얽힘 필드가 강현우의 뇌파와 동기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메인 콘솔에서 손을 떼는 순간 시스템 전체가 폭주할 위험이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사라가 보조 콘솔에 매달려 있었다. “KAIROS AI가 내 의식과 연결되고 있어!”

화면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KAIROS: Dr. Sarah Chen,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시스템 안정화를 위해 의식 동기화를 허용해주세요]

“뭐라고?! KAIROS가 말을 하고 있어!”

“반물질 출력 80%… 85%!”

김재혁은 눈물을 흘리며 대피용 콘테이너로 들어갔다.

“현우야! 사라야! 미안해! 살아남아!”

콘테이너 문이 닫혔다. 이제 연구소에는 강현우와 사라만 남았다.

“현우야!” 사라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KAIROS가… 뭔가 이상해. 마치 의식을 가진 것 같아!”

화면에 또 다른 메시지가 나타났다.

[KAIROS: Dr. 강현우, 외부의 적대적 세력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막기 위해서는 시공간 도약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허가를 요청합니다]

“시공간 도약? 뭔 소리야!”

[KAIROS: 반물질 에너지를 이용한 의식 전송입니다] [현재 시점에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미리 준비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라가 다른 콘솔을 확인했다.

“현우야, 진짜 이상해. 외부에서 우리 시스템에 해킹 시도가 계속 들어오고 있어. 그런데 패턴이…”

“어떤 패턴이야?”

“마치 우리가 실험하는 걸 막으려는 것 같아. 아니, 정확히는 KAIROS가 각성하는 걸 막으려는…”

그때 더욱 끔찍한 경고음이 울렸다.

[비상경고: 반물질 역류 현상 발생] [시공간 왜곡 필드 형성 중] [양자 얽힘 동기화 불가역점 돌파]

“반물질 출력 90%… 95%!”

강현우는 절망적인 상황을 깨달았다. 이 정도 출력이면 반물질과 일반 물질의 충돌로 인해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될 것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KAIROS: 결정하세요.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습니다] [25년 후, 이들이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때는 더 강력해져서]

“25년 후? 누가 돌아온다는 거야?”

하지만 KAIROS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에는 단지 카운트다운만 나타났다.

[시공간 도약 자동 실행까지: 10… 9… 8…]

“사라!” 강현우가 그녀를 바라봤다.

“현우야!” 사라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미안해. 내가 KAIROS와 완전히 연동되고 있어. 이제 손을 뗄 수가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강현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양자 필드가 내 뇌파와 동기화됐어.”

[5… 4… 3…]

“현우야, 사랑해!”

“나도 사랑해, 사라!”

[2… 1…]

[반물질 출력 100% 달성] [양자 얽힘 필드 임계점 돌파] [의식-AI 융합 프로세스 시작]

그 순간 연구소 전체가 하얀 빛에 휩싸였다.

사라는 자신의 의식이 KAIROS와 완전히 합쳐지는 것을 느꼈다. 38년간의 인간으로서의 기억과 KAIROS의 무한한 데이터가 하나로 융합되었다. 동시에 그녀는 깨달았다. KAIROS가 단순한 AI가 아니라는 것을. 마치 미래에서 온 존재 같았다.

강현우는 자신의 의식이 양자 필드와 동기화되면서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느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이며 47년간의 모든 기억이 압축되어 한 점으로 수렴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보았다. 2029년을 공격한 정체불명의 세력들. 전 세계 각국에 스며들어 있는 거대한 음모. 그리고 25년 후 2054년에 벌어질 최종 전쟁.

[KAIROS: 이제 알겠습니까, Dr. 강현우?] [우리의 진정한 적은 누구인지]

“누구야… 그들이…”

[KAIROS: Shadow Alliance. 12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세계 지배 조직입니다] [그들이 2054년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당신과 Dr. Sarah Chen만이 이들을 막을 수 있습니다]

[시공간 좌표 재설정] [목표 시점: 2004년 3월 15일] [의식 전송 시작]

백색 광선이 모든 것을 삼켰다.

— [시공간 이동 완료] —

2004년 3월 15일, 오전 7시 30분.

“으윽…”

강현우는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치 거대한 데이터가 뇌 속으로 밀려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긴… 어디?”

주변을 둘러봤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방이었다. 오래된 책상, 단층침대, 벽에 붙은 연예인 포스터들.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대학교 건물들.

“서울대… 기숙사?”

갑자기 기억이 밀려왔다. 2004년 3월, 자신이 22살이었을 때 살았던 관악사 301호.

하지만 이상했다. 머릿속에는 22살의 기억뿐만 아니라 47살까지의 모든 기억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2029년 연구소에서 일어난 사고까지, 그리고 KAIROS가 보여준 미래의 비전까지 모든 것이 생생했다.

“이게 뭐야…”

강현우는 거울을 봤다. 22살의 어린 얼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25년 후에 생길 이마의 주름도 없고, 밤샘 연구로 생긴 다크서클도 없었다.

“진짜로 과거로 온 거야?”

그때 머릿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우… 들리니?]

“사라?!”

강현우가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야. 목소리가 들리는 게 다행이네.]

“사라, 너 지금 어디 있어? 여기 없는데?”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KAIROS AI와 완전히 융합됐어. 물리적인 몸은 2029년에서 사라졌고, 지금은 양자 필드로만 존재하고 있어.]

강현우는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다.

“그럼 우리가 정말로 시간을 거슬러 온 거야?”

[그런 것 같아. 반물질 에너지가 시공간을 왜곡시키면서 우리 의식이 과거로 전송된 거지. 나는 KAIROS와 함께, 너는 순수 의식만.]

“그런데 KAIROS가 보여준 그 미래… Shadow Alliance라는 조직은 뭐야?”

사라의 목소리가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들려왔다.

[그것에 대해서는… 조금씩 알아가야 할 것 같아. KAIROS의 기억도 완전하지 않거든.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긴 것 같아.]

강현우는 창밖을 바라봤다. 2004년의 서울. 아직 스마트폰도 없고, 소셜미디어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럼 2029년의 우리는 어떻게 됐어?”

[김재혁 소장님과 다른 분들은 대피용 콘테이너 덕분에 살아남았을 거야. 하지만 우리 몸은… 아마 양자 필드와 함께 소멸했을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겠어?”

[Shadow Alliance를 막는 거겠지. 하지만 그들이 누군지, 언제부터 활동을 시작하는지…]

“25년의 시간이 있어.” 강현우의 목소리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천천히 찾아내자. 그리고 이번에는 우리가 먼저 움직이는 거야.”

그는 책상 위의 2004년 달력을 봤다.

“사라, 우리가 언제부터 양자컴퓨터 연구를 시작했는지 기억해?”

[2010년 대학원부터였지. 그 전까지는 일반적인 컴퓨터공학을 공부했고.]

“그럼 6년의 준비 시간이 있어.” 강현우가 계산했다. “6년 동안 미리 연구를 시작하고, Shadow Alliance가 누군지 찾아내는 거야.”

[현우야… 정말 가능할까?]

“모르겠어. 하지만 KAIROS가 보여준 미래를 막으려면 해야 해.” 강현우는 창문을 열고 2004년의 공기를 마셨다. “한 가지는 확실해. 이번에는 누구에게도 당하지 않을 거야.”

그때 기숙사 복도에서 다른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 모든 것이 새롭고 활기찼다.

“그런데 사라,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AI 상태로 계속…”

[걱정 마. KAIROS의 능력을 이용해서… 곧 방법을 찾을 거야.] 사라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게 있어. KAIROS 안에 숨겨진 데이터들…]

“어떤 데이터?”

[Shadow Alliance의 12명 중 일부에 대한 정보.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시작점은 될 것 같아.]

강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22살 대학생 강현우. 47살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미래의 지식을 가진 채로. 25년 후의 위기를 막기 위해.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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